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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된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

날조된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

기사승인 2015. 10. 1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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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중앙보고대회 개최
北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중앙보고대회 개최: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9일 평양체육관에서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기념하는 중앙보고대회를 열었다고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19편


1945년 10월 10일은 조선노동당 아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립일
김일성, 일제하 쟁쟁한 공산주의운동사 삭제 뒤 ‘1인 역사’로 위조


북한은 지난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았다며 사상 최대의 열병식을 진행했다. 북한 조선중앙TV 등은 이날 오후 3시부터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참석한 가운데 열병식과 퍼레이드 등을 실황 중계했다.

이처럼 북한이 최고의 기념일로 모든 역량을 집중한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은 날조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조선노동당이 만들어진 날은 1949년 6월의 일이다. 1945년 10월 10일은 조선노동당 창당일이 아니라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결성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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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 개최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 개최: 북한은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10일 오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포함한 기념 행사를 열었다. 조선중앙TV는 2시 58분께(평양시 2시28분께)부터 열병식을 위한 군인 입장을 시작으로 실황중계하기 시작했다. 이날 행사는 본래 오전 10시께 시작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우천우로 오후에 진행했다./사진=연합뉴스
◇1945년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당 당수 박헌영

소련 군정의 로마넨코 민정사령관은 1945년 10일 8일 조선공산당(중앙당) 책임비서인 박헌영을 개성으로 오게 하여, 평양에서 대동하고 온 김일성과 회담하던 중 논쟁 끝에 결국 서울에 있는 조선공산당을 중앙당으로 인정하고 평양에는 지부인 북조선분국을 둔다고 합의했던 것이다.

1945년 당시 조선공산당 본부는 서울에 있었고, 당수는 박헌영이었다. 조선공산당 북한지부는 서울 본부당의 승인 아래 결성되었고, 분국의 책임비서도 국내파 공산주의자 김용범이 선출되었다. 김일성이 북조선 분국을 장악한 것은 1945년 12월 17일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에서 총비서로 선출되면서부터다. 김일성의 등장과 관련된 모든 작업은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라는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 지령에 따라 소련군 제25군 정치위원 스티코프의 치밀한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같은 해 8월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후인 1949년 6월 북조선노동당은 남한에 있던 남조선노동당과 통합, 조선노동당으로 개칭되었다.


북한 노동당 창건 70돌 기념우표
북한 노동당 창건 70돌 기념우표: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9일 국가우표발행국이 조선노동당 창건 70돌을 맞아 기념우표(소형전지 1종, 묶음전지 1종, 개별우표 1종)를 발행했다고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김일성 우상화 위해 당 창건일 날조

그렇다면 북한이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1945년 10월 10일로 날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도 김일성 우상화와 관련이 있다. 공산당에서는 투쟁 경력 및 정치적 조직력과 이론적 수준이 당 지도자로서 요건이 된다. 이 3가지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 당수가 된다.

이 3가지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당수에 올랐다면 이는 자기 힘으로 오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을 등에 업고 오른 것이다. 이렇게 자질이 안된 사람이 당수 자리를 유지하려면 자기의 경력을 위조해야만 한다. 북한의 김일성이 바로 이런 경우다.

북한의 김일성이 만들어낸 가공의 역사 항일무장투쟁사는 바로 이런 첫 번째 투쟁경력을 날조한 사례다. 조선노동당과 관련된 날조는 바로 김일성의 ‘정치적 조직력’을 날조한 사례다.

◇1924년 8월 조선공산당 1차 설립

정치적 조직자로서 으뜸가는 경력은 당을 조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공산당이 처음 조직된 것은 1924년 발족한 조선공산당이다. 1924년 8월 17일 전일(全一)이 중심이 되어 이남두(李南斗)·이봉길(李鳳吉)·이정수(李正洙)·이충모(李忠模)·이극광(李極光)·김연희(金演熙) 등 7명이 발기, 서울 운니동 전일의 집에서 결성하였다. 이들은 무산노동자의 단결을 도모하고, 공산주의적 신사회 건설을 활동 목표로 잡았다.

이 때 1912년생인 북한의 김일성은 불과 13세로서 당의 조직에 관여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조선공산당이 얼마 안 가서 무너졌다. 그러나 그 재건은 일제 하에서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조선공산당의 재건은 1945년 해방 직후인 8월 24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이뤄졌다. 당수는 박헌영이었다.

일제 때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가 얼마 안가 해체된 역사는 북한의 김일성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일제 당시 조선공산당의 붕괴는 선배 공산주의자들의 과오로 돌렸다. 그리고 진정한 당의 창건투쟁은 오로지 북한의 김일성에 의해서만 추진될 수 있었고 그래서 창건된 것이 조선노동당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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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스탈린 앞에 선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오른쪽)
◇김일성,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역사 모두 삭제

때문에 김일성은 일제 강점기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전 이후 숙청시킨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1945년 8월) 역사도 지워버렸다. 오로지 자신이 관계한 1945년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립 이후의 역사만 정통으로 잡은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일제 시대 국내의 조선공산당 창건 초기 역사를 ‘종파주의적 해독’이란 말로 헐뜯고 있다. 또 이 때문에 그 이후의 공산주의 운동 전반이 크게 오염되었다고 악평한다.

동시에 북한의 김일성이 일제 강점기 당시 중국 공산당에서 일했다는 것도 지워버리고, 1930년부터 오로지 조선공산당을 새로 조직하기 위해 투쟁했다고 경력을 바꾸어 놓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일제 하에서 조선공산당을 새로 조직하지 못했고 그럴만한 인물도 못되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국내가 아닌 만주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그 대신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을 창건하기 위한 거창한 토대를 만드는 사업을 진행했고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당 창건 70주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북한 김정은, 당 창건 70주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인 10일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조선노동당의 시초는 14살 김일성의 ‘ㅌ·ㄷ’

북한의 김일성은 당 창건 사업을 조국광복사업과 밀접하게 배합하며 추진했으며 동시에 무장투쟁의 고된 시련 속에서 그 토대를 구축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한 역사의 시발이 바로 1926년에 14살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옳지 못한 사람들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조직 운영했기 때문에 쉽게 망하고 말았다고 선전한다. 같은 시기에 14세 소년이던 북한의 김일성이 조직한 ‘ ㅌ·ㄷ’는 천재적 역량 때문에 장차 조선혁명을 걸머질 진정한 청소년 조직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이를 기초로 해서 새날소년동맹, 반제청년동맹,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 백산청년동맹 등이 순차적으로 조직되었고, 그것이 다시 조선혁명군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항일유격대로,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성숙 발전했다는 것이 북한의 역사 줄거리다.

이렇게 북한은 항일무장투쟁도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 같은 기라성 같은 역사를 모두 지워버리고 김일성 1인의 역사로 위조하고 있다. 당 조직과 관련된 역사도 쟁쟁한 공산주의 운동사를 모두 삭제하고 김일성 관련 역사만 정통으로 세우고 뿌리를 찾고 있다.



평양 시내에 내걸린 당 창건 70주년 기념 간판
평양 시내에 내걸린 당 창건 70주년 기념 간판:지난 9일 평양 시내에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기념 간판이 걸려 있다./사진=연합뉴스
◇연안파·국내파 공산주의 투쟁보다 미미했던 김일성 항일투쟁

사실 북한 김일성의 항일 투쟁 경력은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이나 전체 독립운동사에서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경력이다. 공산주의 독립운동사만 보더라도 일제 시대 중국공산당의 본부였던 중국 본토의 연안(延安)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 산하였지만 민족적 주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제와 싸웠다. 김두봉, 최창익, 무정, 박효삼, 박일우 등 쟁쟁한 투사들이 그들이다.

또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후원도 없이 옥중에서 혹은 지하에서 항복할 줄 모르고 일제와 투쟁했다. 박헌영, 오기섭, 주영하, 이강국, 이승엽, 허성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헌신적인 투쟁경력에 비추면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항일연군의 대원이었던 북한 김일성의 경력은 용병적 성격 이상이 될 수 없다. 또 이 동북항일연군의 활동도 거의 비적과 다름 없었다. 북한 김일성은 그래서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인민혁명군’을 만들어 냈고, 자신보다 훨씬 쟁쟁한 투쟁경력을 가진 연안파와 국내파를 모두 숙청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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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파 공산주의 거두였던 박헌영, 김일성은 한국전쟁 뒤 그에게 ‘미제의 간첩’이란 누명을 씌워 총살했다.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립도 박헌영이 승인한 일

때문에 김일성은 1920년대 1차 조선공산당 설립 역사도 1945년 8월의 국내파 공산주의 거두인 박헌영이 주도한 2차 조선공산당 설립 역사도 모두 묻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국내 공산당 역사에 처음 등장한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립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삼고 기념하는 것이다.

사실 이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립은 서울에 있는 조선공산당 본부에서 박헌영이 승인해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김일성이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시조이며 지도자라고 선전해 왔다.

이처럼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은 북한 당국의 철저한 역사 조작이다. 문제는 국내외 언론은 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관련 동향을 앞다퉈 보도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언론이 북한이 조작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3대 세습 김씨 왕조를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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