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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양은 도시락과 김치볶음

[칼럼][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양은 도시락과 김치볶음

기사승인 2014. 02.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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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이 지났습니다. 농경민족인 우리나라는 새해 첫 보름날에 지신밟기, 쥐불놀이, 달집 태우기를 하면서 한 해의 액운을 몰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지요. 산업화에 따라 이제는 많이 잊혀졌지만, 우리전래 풍습의 상당수는 대보름날에 하던 거랍니다.


저도 올해는 대보름날, 마음먹고 좋은 분들과 남해에 가서 달집 태우기를 했습니다. 휘영청 달 아래 해변가에 나무와 짚단으로 달집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헌 속옷을 태우면서, 한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안녕을 비는 참신한 경험을 했답니다. 달집은 생 대나무와 함께 태우는데, 대나무가 탈 때 나는 타닥타닥하는 소리와 함께 나쁜 모든 것이 터져 나가는 거라더군요. 제가 아는 모든 분들의 건강과 안녕을 진심으로 빌었답니다.


점심을 먹으러 동료들과 편의점앞을 지나는데, 중년의 직장인 한 분이 편의점 안에서 도시락을 드시고 계시더군요. 도시락이라. 흠. 고등학교때. 겨울방학 끝나고 등교한 학교. 그때는 어머니가  도시락을 두 개씩 싸 주셨지요. 노란 양은 도시락. 기억하시나요? 도시락을 열었을 때 그 새하얗고 네모난 밥의 기억. 한 구석에 반찬 두어가지가 있지요.

잘 사는 집 친구들은 보온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지만, 대부분은 노란 양은 도시락이었지요.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김장김치 볶음이나 멸치볶음이 반찬입니다.


한가지를 겨우내내 계속 먹으니 물릴법도 하지만, 저는 볶은 김치가 그리 좋았습니다. 때때로 도시락 밖으로 반찬국물이 새어나와서, 교과서와 공책에 김치물이 빨갛게 들고는 했지요. 어느날 미어터지던 등굣길 만원 버스에서, 제 책가방에서 새던 김치국물의 냄새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려서 두정거장 걸어 학교간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지각을 해서 혼이 났지요. 아, 다시 그날이 온다면.


피끓는 나이라서, 점심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일단 2교시 끝나고 도시락 하나를 까먹습니다. 하얀 밥에 볶은 김치입니다.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양념을 좀 씻어내고 프라이팬에서 들기름에 척척 볶아내는 김치볶음. 어머님은 밥위에 계란 프라이를 늘 얹어주셨습니다.


밥과 볶은 김치를 계란 프라이와 함께 한 숟가락 가득 떠 먹습니다. 볼이 불룩하도록 크게 입에 넣은 뒤에 우물우물 씹는거지요. 밥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 친근하고 달달한 맛. 이 시큼하고 편안한 맛. 공부도 밥심으로 하는거야 하시던 어머니의 맛입니다. 김장김치를 볶아야 제 맛이 납니다. 다른 반찬 아무것도 없어도 한 끼를 채워주는, 이 맛. 저는 어떤 맛있는 반찬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질리지도 않고요. 요사이는 급식을 한다니, 아이들은 이 맛을 모르겠지요. 봄이 올 때 까지 이 볶은 김치는 도시락 반찬으로 빠지지 않았더랬지요.
 
나머지 도시락 하나는 교실에 있는 난로위에 얹어둡니다. 여러개의 도시락을 탑처럼 쌓게 되니까, 맨 밑에는 타고, 맨 위에는 덥혀지지 않으니, 그 날 주번이 잘 돌려놓아 주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지겨운 4교시가 끝나고, 친구들과 모여 도시락 뚜껑을 딱 열었을 때, 김이 모락 모락 납니다. 똑같은 밥에 똑같은 반찬을 두시간만에 먹는데도 그리 맛있었답니다.


밥 냄새. 김치냄새. 멸치볶음 냄새. 아이들 떠드는 소리. 뛰어다니는 소리. 아. 물론 소시지 계란부침을 싸오는 친구들도 있고, 더 좋은 반찬을 싸오는 친구들도 있었지요. 친구들이 빼앗아먹는다고 계란 프라이를 밥밑에 깔아오는 학생도 있고, 어떤 친구들은 꽁보리밥을 싸오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학창시절 도시락에 대한 추억 한 두개쯤은 모두들 다 있으실 겁니다.


너에게는 참 할 말이 없다/위로 누나 넷으로 늦본 맏이 그늘에 묻혀/
입는 것 하나 제대로 네 몫으로 산 것 없고/
먹는 것 하나 따뜻하게 네 것으로/ 챙겨진 일 없던/아우야/(중략)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리밥으로 덮은 형의 쌀밥 도시락과/
쌀밥으로 덮은 네 보리밥 도시락의 차이를/
묵묵히 눈물로 삼켰을 아픈 인내와/
희생의 대가임을 이 형인들 모를까//(후략)        - 오인태 ‘아우에게’


아까 점심때 혼자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먹던 직장인을 생각합니다. 사실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시켜먹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어서,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혼자서 전자레인지에 1분30초 동안 돌리고 있는 직장인은 왠지 쓸쓸해 보입니다.


도시락은 원래 엄마가 싸 주는 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늦겨울 어느날 회색빛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잘 포장된 편의점 도시락을, 다른 음료수도 없이 꾹꾹 삼키는 덩치 산만한 직장인의 모습에서, 까닭모를 먹먹한 애잔함을 느낍니다. 저 도시락에도 김치볶음이 들어있을까요.


이제 퇴근시간. 창밖은 여전히 춥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어린시절 겨우내내 먹었던 김장김치로 만든 김치볶음과 도시락을 추억합니다. 난로로 덥혀지던 교실, 도시락 차곡차곡 쌓아놓고 점심시간만 기다리면서, 공부안하고 딴 짓만 하던 친구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흠. 그 긴 시간동안 매일 매일 삼형제 도시락을 두 개씩 싸 주시던 어머님께 전화드려서, 그때 참 맛있었노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집에가면 아내에게 부탁해서, 김치 한 번 볶아 달라고 해보려구요. 혹시 눈이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흐린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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