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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5월의 싱그러움 보리밥과 강된장

[칼럼][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5월의 싱그러움 보리밥과 강된장

기사승인 2013. 05. 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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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인 5월입니다. 초록으로 물든 청보리밭은 봄이 절정에 이르다 못해서 뜨거운 여름을 예고합니다. 어버이날 고향에 다녀오는데, 어라, 보리밭이 있더군요. 파란 하늘, 흰구름,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보리의 물결, 보리밭에 가면 바람이 보입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보리밭입니다.

요사이 보리밭 보신 적 있으십니까. 옛날,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 쯤인가요, 아버지와 보리밭을 지나는데 불쑥 “겨울 보리는 밟아 주어야 잘 자란다” 하셨지요. 아니, 싹을 밟아야 잘 자란다니 이해가 잘 안되었지만, 더 묻지 않았답니다. 나중에 좀 더 커서야, 보리는 겨울에 보리의 싹이 뜨지 않고 뿌리를 잘 내리도록 보리밭을 밟아 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흠. 보리밭이라. 옛날에는 보리밭에서 돌발사고가 많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화사한 봄날, 달리 갈 곳이 없던 뜨거운 연인들이 보리밭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제는 보리밭을 볼래야 보기가 어려우니 그저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지요. 씨익 웃어봅니다. 좀 낭만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오월의 보리밭에서 아기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사랑을 나누기위해 방을 찾아다니는 제8요일의 연인들처럼 마땅히 사랑할 곳이 없는 가난한 연인들에게는 5월의 보리밭은 사랑을 나누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했다.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래서 내게 보리밭은 불안한 아름다움이 된 것일까. 지금, 저, 보리밭에 일렁이는 알 수 없는 바람처럼.  (신경숙, 자거라 내 슬픔아 중에서)

보리는 추위에 약하다는 결점을 빼고는 아무 흙에서나 자라는 곡물인데다 재해에 강하고 잡초를 뽑아주지 않아도 되므로 벼에 비하여 재배가 수월하여, 서민들은 삼국시대이래 보리를 주식으로 삼은거지요.

5월 중순, 소만 때가 되면 봄보리가 익어가기 시작하는데, 만물이 점차 자라서 가득 찬다는 뜻으로 소만(小滿)이라고 부릅니다. 이때부터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는데 들에는 보리가 익어가며, 산에는 부엉이 소리가 정겨운 때라 합니다. 보리추수를 하기 전까지를 `보릿고개`라고 부르는데 쌀은 떨어지고 보리는 익지않은 딱 이맘때인 것인데, `보릿고개는 태산보다 높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식이 떨어져 어렵게 지낼 때였던 것이지요. 춘궁기(春窮期)라는 뜻인데,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는 실감나지 않는 옛말이 되어버린 것이지만요.

입맛이 없을 때 보리밥과 강된장만큼 좋은 궁합이 없습니다. 보리밥을 비벼 먹을 때는 일단 그릇이 중요합니다. 밥사발보다는 좀 큰 그릇이 좋지요. 고슬고슬한 보리밥을 살 살 풀어놓고, 강된장을 넣어 슥 슥 비비는 겁니다.  이때 들어가는 채소나 나물등은 그야말로 그날 그날 기분이나 냉장고 재고상태에 따라 다르지요. 가급적 제철 채소를 권장합니다. 제철채소가 없다면, 상추도 좋고 뭐 어떤 나물이라도 좋습니다.

슥슥 비벼 한 숟가락 최대한 가득 퍼서 먹어야 합니다. 볼이 터져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먹어야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기분이 매우 풍성해집니다. 보리밥알은 쌀 밥알보다 조금 크고 표면이 맨질맨질해서 잘 씹히지 않고 입안에서 뱅뱅 돕니다. 오히려 약간 탱탱한 느낌이지요. 뜨뜻하고 달착지근한 곡물의 맛이 묵직하고, 식감은 좀 거친 편입니다. 짭짤하고 개운한 강된장을 넣어 비비면 입안에서 섞여 친근한 맛, 고향의 맛이 납니다. 보리밥의 달달한 맛과 강된장의 짭잘한 맛은 참으로 환상적인 궁합입니다.

편안하고, 모나지 않은, 왠지 옛 생각나게 하는 그런 맛입니다. 보리밥은 입맛 없는 초여름에는 열무김치랑 넣어 고추장에 비벼 먹거나,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함께 먹으면 참 맛있습니다. 초여름, 파란 하늘아래서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밭두렁에서 새참으로 먹는 보리밥이, 오이나 풋고추 푹 찍어 먹는 보리비빔밥이, 다른 반찬이 없어도 그리도 달고 맛있었노라고 아버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사이도 간혹 그때가 생각 나 사드신다고요. 역시, 추억의 상당한 부분은 음식이고 맛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밥 풋나물을 알마초 먹근 후에
바횟긋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그나믄 여나믄 일이야 부럴 줄이 이시랴

고산[孤山] 윤 선도(尹 善道)作  산중신곡(山中新曲)중 만흥(漫興)

조선 정조시대, 치열한 당쟁 끝에 윤선도 선생이 유배지에서 유유자적하며 지은 시입니다. 그저 보리밥에 풋나물 한 접시의 거친 음식이지만 맛있게 먹고, 바윗가 물가에서 자연과 더불어 실컷 놀고 나니 그 밖에 또 부러운 일이 무엇이 있으랴하는 거지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산해진미를 탐하고 몸에 좋다는 보약이라면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요즈음의 현대인과는 다른, 자연을 벗삼고 안빈낙도하는 선비의 마음을 봅니다. 오늘저녁은 아내에게 부탁해서 보리밥에 강된장 비벼서, 풋고추 된장에 푹 찍어서 시원하게 한 그릇 뚝딱 해치워야겠습니다. 보리밥 한 입 크게 우물거리면, 5월의 싱그러운 하늘, 흰 구름,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보리밭이 보일겁니다. 지금, 보리가 익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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