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특별기고] 중동에서 ‘神들의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특별기고] 중동에서 ‘神들의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기사승인 2023. 11. 01. 18:24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202310250100245260013929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지난 10월 7일 아랍 하마스의 기습공격과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반격으로 중동에서 '神들의 전쟁(the War of Gods)'이 다시 재개되었다. 이 신들의 전쟁은 1948년 5월 14일 유엔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 선포되는 바로 그 순간에 처음 시작되었다. 서양의 유일한 전쟁 철학자 칼 폰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전쟁의 동기란 서로 간의 증오심이나 아니면 양립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목적이다. 그러나 증오심에서 시작한 전쟁은 주로 야만인들 사이의 전쟁인 반면에 문명인들의 전쟁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목적, 즉 정책의 대결이다.

그러나 문명인들 사이에서도 증오심이 쌓이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목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반대로 양립할 수 없는 정책으로 싸우다 보면 증오심이 발생한다. 중동에서 유대인과 아랍인들 간의 전쟁은 분명히 종교적 증오심에서 출발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결은 세속적인 국가의 영토를 위한 투쟁이다. 인간과 달리 神은 불멸이다. 그러므로 신들의 전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근대 유럽국가들의 전쟁의 경우처럼 결코 협상으로 항구적 평화를 수립할 수가 없다. 이것이 1948년 아랍 속에 이스라엘이 건국한 이래 계속되는 중동전쟁의 엄연한 기원이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인류애적 연민

"자기의 조국에서 끌려 나온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돌아갈 어떤 곳이 있다. 그러나 유대인은 갈 곳이 없다." 이 말은 엄청난 고뇌 끝에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던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의 말이었다. 트루먼이 고백했듯이 그 문제는 복잡하고, 걷잡을 수 없고, 아주 감정적이고 폭발적이라서 아주 극도로 문제였다. 그 결과는 다음 수십 년 동안 중동에서 미국의 외교와 국가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트루먼의 생각도 여러 방향으로 끌렸지만 그도 대다수 미국인들처럼 상상할 수 없는 공포를 겪은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생존자들인 수십만 명에 달하는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뭔가 옳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들을 위한 그의 동정심은 진정이었고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았다. 그의 포레스털 국방장관이 전시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상기시키자 트루먼은 석유가 아니라 정의의 관점에서 상황을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이 위임통치를 포기하고 유엔으로 넘긴 팔레스타인 문제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의 조국으로 만든다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시작했으며 그 대의를 승인했던 미국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저명했던 인물은 미국의 제28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독일제국의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장악했다.

그리고 영국은 전쟁수행을 지원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당시 외무상의 이름으로 소위 "밸푸어 선언(the 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영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고대 왕국인 팔레스타인에게 미래 유대 조국의 아이디어를 인정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곧 독립이 뒤따를 것이라는 이해 하에 새로 창설된 국제평화기구인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특별한 위임통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영국의 위임통치는 끝나지 않았다. 오직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에 와서야 국력의 한계를 느낀 영국의 애틀리(Attlee) 정부가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철수할 것이라며 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국제연맹을 대체해 이제 막 창설된 새로운 국제평화기구인 유엔(the United Nations)으로 넘긴다고 발표했다.

당시 유엔을 주도하던 미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즉각적인 독립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라는 두 개의 별개 국가들로 분단되거나 분할된 다음에 경제적 통합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은 유대인들이 새 조국으로 대량 이민하는 아이디어를 지지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 있는 유대인들은 분단을 원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유대인들의 이민에 반대했다. 영국인들에게 당시 미국의 트루먼(Truman) 대통령은 신중하지 못한 친-시온주자로 보였다. 미국무부의 고위관리들은 영국인들처럼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의 대결을 어떻게든 해소될 수 있을 때까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엔의 신탁통치(trusteeship)를 선호했다. 그러는 동안에 팔레스타인에서는 폭력과 테러가 계속되었다. 이미 많은 피가 뿌려졌다. 아랍집단들은 유대인 정착촌들을 공격했다. 유대인 테러주의자들은 영국군을 공격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군에 의해 투옥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토요일 추수감사절 주말에 유엔 총회는 극적인 2시간 30분 동안의 회의 끝에 작은 표 차이로 분단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무대 뒤에서 그 안건이 통과되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랍국가들의 대표들이 퇴장해 버린 총회장에서 시온주의자들은 기뻐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책임을 6개월 이내인 1948년 5월 14일 유엔에 위임한다고 발표했다. 아랍인들은 분할이 곧 전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제임스 포레스텔(James Forrestal) 미 국방장관은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을 모두 바다에 쓸어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악관에 대한 유대인들의 압력은 며칠 동안 줄어들지 않았다. 수십만 장의 우편카드가 백악관의 우편함에 홍수를 이루었다. 미국의 33개 주의 입법부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국가 수립을 찬성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40명의 주지사들과 절반 이상의 의회의원들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과 미국의 국가승인

1948년 5월 14일 금요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가 공식적으로 끝나는 바로 그날 워싱턴 시간으로 오후 6시(팔레스타인 시간으로는 자정)에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될 것이라고 알려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승인에 반대해 온 마샬(Marshall) 국무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을 예방하여 그가 대통령이 취하고 싶어하는 입장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샬 국무장관은 국무성에서 유엔문제 담당자인 딘 러스크(Dean Rusk)를 뉴욕에 비행기로 급파하여 미국의 전 대표단이 트루먼 대통령의 입장에 항의하여 사임하는 것을 막았다. 마샬은 몇몇 친구들이 사임을 촉구하자 정책을 결정할 헌법적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결정을 했다고 해서 사임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다.

텔아비브(Tel Aviv)에서 이제 이스라엘인들은 국가 탄생을 경축했고 또 아랍세계로부터 공격을 격퇴할 준비에 들어갔다. 5월 25일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했고 그에게는 국가원수의 모든 명예가 수여되었다. 수많은 사진 기자들 앞에서 그는 미소 짓고 있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 권의 토라(Torah)를 선물했다. 미국의 승인은 루비콘(Rubicon)강을 상징적으로 건넌 것이지만 그런 사실이 유대국과 아랍국들 사이의 문제를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우지 않았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이스라엘이 국가수립을 선포한 바로 그날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이라크가 다음 날 뒤따랐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이 승인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금지의 종식, 재정적 지원 그리고 법적 승인의 요구에 직면했다. 바이츠만이 벨푸어 선언에 관해서 말했듯이 "세계의 모든 정부들이 그에게 국가를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말만의 선물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건설할 것이고 유대인 국가는 현실이 되고 사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새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정당성과 국제적 승인이 필요했다. 데이비드 나일스(David Niles)의 결론처럼, 만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살아있고 트루먼이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이스라엘 국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트루먼이 없었더라면 새 이스라엘 국가는 처음 어려운 몇 년 고난의 시기를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그 이후에도 생존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무성과 유엔의 미국 대표자들의 입장을 마지막 순간에 뒤엎고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는 용기와 결단을 보여준 트루먼 대통령이 이스라엘에서 영웅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명예로운 전당에 올라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트루먼 대통령은 일종의 국부 같은 존재가 되어 이스라엘의 국가수립자들과 함께 영원히 존중될 것이다.

◇불멸의 神들 사이에 평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와 미국정치에 미국의 유대인들이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스라엘은 미국과의 공식적 동맹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을 동맹국, 아니, 그 이상의 형제국처럼 대우하여 왔다.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지원이 계속되는 한 아랍국가들은 결코 이스라엘인들을 모두 그들의 소망대로 바닷속으로 쓸어버릴 수 없다.

반면에 거대한 아랍의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작은 섬과 같은 이스라엘이 아랍국들을 무력으로 괴멸할 수도 없다. 중동의 상황을 토마스 홉스의 유명한 표현을 원용하여 말한다면 자연상태인 "전쟁상태(the state of war)"로 계속 남을 것이다. 따라서 중동에서 항구적인 평화는 결코 기대할 수 없고 오직 신들의 전쟁만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