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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 칼럼] ‘영어 지존’ 조윤선의 영어 학습기(6)

[조윤선 칼럼] ‘영어 지존’ 조윤선의 영어 학습기(6)

기사승인 2011. 11. 07.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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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펌과 미국 유학시절, 좌충우돌 영어 몸으로 익히기
조윤선 한나라당 국회의원
고시공부를 시작하게 되니 영어와 멀어졌다. 그렇다고 고시 영어과목이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었다.

영어 때문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점수를 받으려면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아도 됐지만, 영어에서 점수를 따려고 생각하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투자한 만큼 점수가 반영되는 불어나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를 선택하는 고시생들도 꽤 많았다.

토플문제 같은 기출 문제집으로 매일 한 시간씩만 공부를 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작심 3일이었다.

다른 게 급하니 영어는 늘 뒷전이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은 하루 공부를 시작할 때 영어를 한 시간 풀고 시작하자고 결의를 다지곤 했다.

사법 연수원을 마치고 로펌에 들어가게 됐다. 계약 협상이나 법률 자문이 주를 이루었는데 외국인 회사를 대리하는 일도 많았다.

1984년 대학 입학부터 영어공부를 안하기 시작해 로펌에 입사했던 1994년이 되어서야 영어를 써야했으니 나의 영어 공백기는 10년이 좀 넘었다.

사무실에서 외국인을 대리하는 사건 담당 팀에는 원어민 변호사가 있었다. 외국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을 돕는 일을 했다.

벽안에 금발을 한 외국인 변호사들과 소통을 하려니 진땀이 났다. 로펌에 물어오는 질문은 보통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문제에 기본적인 리서치는 나 같은 1~2년차의 몫이었다.

한글 문헌을 찾아 리서치를 한 후, 국문으로 된 요약 메모를 만들어 팀원들에게 돌리면 모두 읽고 방향과 내용을 조율했다.

그 내용을 원어민 변호사에게 얘기해주고 영어 의견서를 쓰게 하는 일은 나의 일이었다. 정말 ‘머리에서 쥐가 난다’는 게 어떤 소리인지를 알 것 같았다.

국문 의견서를 쓰기에도 버거운데 이걸 외국인에게 이해를 시켜 영어로 의견서를 쓰도록 해야 하니 그 과정의 지난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원어민 변호사들은 외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딴 사람들이라 법도 우리와 많이 달랐다.

성격이 너그러운 사람들은 잘 못 알아듣겠다면서 차근차근 물어보고 배려하는 반면, 까다로운 변호사들은 도대체 무슨 소린지를 모르겠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했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지 않는 외국 변호사들과 티격태격하는 일도 있었다. 동료들과 ‘우린 영어론 바보 같다’고 자괴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영어로 일하는 노하우가 생겼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영어 표현은 딱 한 개씩만 외워 놓는 것이었다. 어떤 말을 하고 싶으면 늘 같은 문장을 썼다.

매번 같은 문장을 쓰지만 듣는 클라이언트가 달라지니 내가 같은 문장을 쓴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 턱이 없었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좋은 영어선생님은 외국인 클라이언트와 외국 변호사들이었다.

특히 뉴욕이나 런던에 있는 굴지의 로펌의 유명한 파트너 변호사나 큰 회사의 본사 중역들과 일을 할 때에는 그들이 회의시간에 말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말하는 태도나 톤도 주의 깊게 들었다.

어차피 변호사 일이라는 게 도제식으로 보고 따라하면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선배건 동료건, 클라이언트건 실력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 자체가 둘도 없는 공부였다.

영어로 회의를 할 때 귀에 들리는 표현 중 예전에는 몰랐던 표현들을 회의 노트 상단에 적어 나갔다. 회의를 한번하면 서너 개의 표현을 새로이 배울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곤 회의에서 배운 표현을 다른 회의에서 써먹곤 했다. 워낙 정확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어서 안심하고 따라 해도 됐다.

3~4년이 지나자 영어로 일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영어로 밥을 먹는 건 아직 멀었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밥상머리에서 하는 대화에 대한 콘텐츠가 부족했던 것이다.

본사의 CEO가 올 때에는 현홍주 전 유엔 대사같은 분을 모셔 회의를 하거나 식사를 했다.

CEO들은 구체적인 소송이나 계약협상이 어떻게 되는지를 묻지 않았다.

남북 관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지금 정부는 어떤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될 것 같은지, 등 거시적인 것에 대해 많이 질문했다.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대답을 잘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현 대사께서 답변하시는 걸 들으면서 마치 예상문제가 적중한 듯 정연하게 말씀하시는 순발력과 논리, 통찰력에 감탄을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그분은 젊은 시절부터 매일 영어신문을 읽으면서 영어 표현을 가다듬으셨다고 했다. 그 고급스런 영어는 언감생심 따라갈 수도 없었다.

로펌에서는 보통 변호사들에게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유학하고 일할 수 있는 안식년을 준다. 가서 법 공부를 더하고 오라는 게 아니고, 견문을 넓혀오라는 게 주된 목적이다.

문화를 알게 돼야 의사소통이 더욱 원활하기 때문이다. 미국 연수를 가기 전 나는 미국을 다녀오면 정말 원어민처럼 영어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법대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영어 때문에 그렇게 좌절감을 클 수가 없었다. 분명히 단어 뜻을 모르는 게 아닌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학기말 논문을 써내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데, 내가 사용하는 어휘의 수준이 너무나 볼품이 없어 덩달아 나의 연구 수준이 평가절하 당하는 게 뻔히 보여 속상했다.

워싱턴의 연방 항소법원에서 일할 때였다. 판사가 판결문 초안을 써오라고 했다. 공무원 신분에 관한 소송으로 간단한 것이었지만 판결문 쓰기는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로펌에서 밤새 일하던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기를 쓰고 판결문을 썼다.

내 머리로는 판결문체의 영어 문장이 구사되지 않아 양쪽 변호사가 쓴 문장 중에 나의 논리에 맞는 변호사의 문장을 골라 논리적으로 배열한 다음에 문장을 줄이고 단어를 바꾸면서 판결이유를 써나갔다.

판결문 초안을 완성한 다음 같은 방에서 일하던 로 클럭(Law Clerk)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그 친구는 성의껏 아주 ‘많이’ 수정을 해줘다. 그런 뒤에도 나의 초안은 법원 전체의 회람에 돌려지는 과정에서 거의 내가 쓴 단어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교정됐다.

큰 실수도 했다. 무척 어리게 보였던 클럭 한사람이 사실은 결혼해 열 살이 되는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부인과 아들이 법원에 놀러왔는데 정말 이렇게 큰 아들이 있는지 몰랐다는 취지로 ‘Really?’라고 물어본다는 게 부인 앞에서 ‘Are you sure?(네 아들인거 맞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가 웃으면서 ‘I am pretty much sure (난 확실히 그렇게 알고 있는데)’라고 답을 하는 순간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내가 실수할 때마다 늘 알았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때까지 이 같은 실수를 얼마나 많이 했을지. 그리고는 알게 됐다.

미국 현장 학습으로 나의 영어실력이 는 게 아니라 알아듣지 못해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 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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