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통일 넘어 유라시아이니셔티브 길, 헤를렌강에 있다.

통일 넘어 유라시아이니셔티브 길, 헤를렌강에 있다.

기사승인 2015. 01. 25. 18:15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칭기즈칸의 발원지 동몽골 탐사 기행 (2편)
IMG_3213
지난 1월 16일 헤를겐 강변에 선 한국과 몽골 미국의 3국 탐사기행단, 탐사단 뒤에 보이는 산이 멜쯔하이르항산(멜쯔하이르항산은 능선이 여신이 누워 있는 형상이다)/사진=최영재 기자
[아시아투데이 창간 10주년/한몽 수교 25주년 특별기획]

몽골 울란바토르/아시아투데이 최영재 기자 = 한·몽수교 25주년을 맞아 (사)코리아글로브와 한국몽골학회, 아시아투데이는 민간 외교사절단을 꾸려 칭기즈칸의 발원지인 동몽골 지역 탐사기행에 나섰다. 탈북동포까지 포함한 한국과 몽골, 미국 등 3개국 모두 10여명이다.

이 동몽골 지역은 고구려·부여 등 우리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다. 몽골과 카자흐스탄·터키 등 지금은 나라 이름을 달리 살고 있지만 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우리 민족과 한 뿌리를 갖고 있는 형제들이다.

1월 16일 정오 무렵, 지프 4대에 나눠 탄 울란바토르시 동쪽의 칭기즈칸의 발원지 헤를렌 강가에 도착했다. 이 헤를렌 강은 몽골 민족과 북방 겨레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곳이다.

IMG_3183
헤를렌강변에 정차한 탐사단의 선두차량/사진=최영재 기자
저 멀리 부르항산(불함산)이 둘러서고 가까이에 헤를렌의 적봉이 지켜섰다. 눈 앞에는 멜쯔하이르항산의 여신(멜쯔하이르항산은 능선 모양이 여신이 누워 있는 형상이다)이 내려다보고 있다.

헤를렌강은 러시아 아무르강의 발원지다. 동몽골 지역 최고의 전략 요충지다. 여기서 헤를렌강은 동으로 꺾어 흐르다 톨강과 합류해 울란바토를 관통한다. 이윽고 아무르강으로 굽이쳐 만주벌로 흘러 만주벌판을 품는다. 그 길을 따라 이곳의 ‘부르항’은 ‘불함’으로 옮겨가고 ‘적봉’도 만주의 ‘적봉’으로 거듭난다.

IMG_3210
헤를렌 강변, 이 헤를렌강변에서 칭기즈칸 유목지가 들어서고 칭기즈칸 군대가 발원했다. 이곳은 칭기즈칸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사진=최영재 기자
이 헤를렌강변에서 칭기즈칸 유목지가 들어서고 이곳에서 칭기즈칸 군대가 발원했다. 그리고 이곳은 칭기즈칸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 칭기즈칸의 유해는 유목민족의 특성상 묻힌 곳이 정확하지는 않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이 헤를렌강변 어딘가에서 묻힌 것으로 보면 된다.

그 뒤 대원제국이 쇠락할 때 중원의 명나라 영락제도 1414년 이곳으로 쳐들어왔다 혼이 나고, 청나라 강희제도 이곳을 점령하며 몽골 지역에 대한 교두보를 확보한다. 즉 대몽골제국의 흥망성쇠가 모두 이 헤를렌 강가에서 결판이 난 것이다.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인 셈이다.

IMG_3282
우리 민족 최초의 세계지도 혼일강리도, 이 혼일강리도에는 동몽골의 전략적 요충지인 헤를렌강 영역이 정확히 그려져 있다./사진=최영재 기자
이 곳에서 한·몽골학회 박원길 이사장이 조선 태종조에 제작된 우리 민족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도’의 비밀을 강의했다. 이 혼일강리도에는 동몽골의 전략적 요충지인 헤를렌강 영역이 정확히 그려져 있다.

우리 민족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도의 실질적 제작자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이회였다. 이회는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했고 조선 개국 후에 태조에게 발탁되어 1392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후 1407년(태종 7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을 시종하여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의 벼슬은 사간에 이르렀고 시문에도 능했다.

이회의 선조인 이장(李莊)은 현재 제주도인 탐라의 ‘탐라군민상만호’였고 직책으로 미루어 자신이 몽골인이거나 혹은 제주의 몽골세력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는 인물이다.

당시 태종은 오늘날 올란바토르 동북쪽 헤를렌 강변에서 벌어진 명나라 영락제의 2차 몽골원정(1414년)이 패배로 끝났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북방정세에 정통한 인물이 태종의 주변에 포진돼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그 인물이 바로 이회였다.

즉 몽골계로 추정되는 이회의 집안 내력이나 행적, 혼일강리도의 제작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태종의 국제정세 인식이 매우 정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제정세 인식에 근거해서 태종은 당시 명나라 영락제가 파견한 사신단의 제주 방문을 차단하고 당시 조선 귀속 여부가 불투명했던 제주를 조선의 영토로 분명히 못 박을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호까지 명 황제에게서 받을 정도로 명에 대한 사대를 분명히 했던 조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까지만 해도 실리외교가 분명했고 북방민족들과의 소통구조가 확보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몽골계로 추정되는 이회가 만든 혼일강리도를 펼쳐든 태종은 명나라와 북원이 다투는 때를 틈타 대마도부터 두만강까지 정벌하며 국토를 넓히고 국경선을 확정짓기 시작한다. 현재의 우리나라 국경선을 확정한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영토확정 작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세조는 북방정책의 상징이고 북방민족과의 소통 코드인 ‘혼일강리도’를 묻어버렸다. 이후 조선은 북방정책과 북방기마민족과의 소통을 완전히 접고 스스로 ‘소중화(小中華)’ 국가가 되었다.

몽골 기행단을 이끈 김석규 코리아글로브 상임이사는 “대한민국이 남북을 통일하고 유라시아 영역으로 네트워크를 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몽골과 칭기즈칸의 발원지인 헤를렌강 영역을 주목해야 한다”며 “그것은 우리민족의 DNA에 녹아흐르는 북방 기마 문명의 전통을 되살리는 길이고 코리아가 통일을 넘어서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이론적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IMG_3198
헤를렌 강변에서 피터 벡 전 미 국무부 아시아재단 대표가 몽골과 우리나라의 공통 신앙인 샤머니즘에 근거한 이른바 ‘하늘 굿’의식을 치르고 있다./사진=최영재 기자
기행단은 멜쯔하이르항 산의 여신 앞에 서서, 은잔에 술을 담아 오른손 약지로 술을 찍어 ‘오르고’를 외치며 ‘하늘과 땅과 사람 셋으로 나누어 뿌려 바친다. 몽골과 우리나라의 공통 신앙인 샤머니즘에 근거한 이른바 ‘하늘 굿’이다. 그리고 그 술을 나눠 음복한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에는 역시 제술로 쓴 보드카같은 독주가 제격이다.

기행단은 헤를렌 강변의 ‘하늘 굿’을 통해 800여년 전 역사가 된 ‘한·몽골 동맹’을 ‘한·몽수교 25주년’에 즈음해 되살릴 것을 다짐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유라시아이니셔티브’와 아시아 각 국과 함께 하는 현대판 ‘초원의 길’을 다시 열겠노라고 맹세한다.

몽골민족에게는 이 헤를렌강은 거룩한 강이다. 이 강변에서는 피와 소젖과 오줌은 금물이란다. 모두가 알아서 삼간다고 한다.

헤를렌강변에서 짧고 굵게 하늘굿을 마친 기행단은 지프를 달려 가까운 식당에서 몽골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양고기와 양파, 대파를 한데 볶은 몽골 전통 볶음밥이다.

이제 기행단은 칭기즈칸이 칸이 되기 이전 테무진 시절 첫아내를 적에게 빼앗긴 아픔이 서린 현장으로 이동한다. 기행단이 탄 지프는 다시 초원의 길을 내달린다. 일렬로 달리다 앞 차량이 내쏟는 먼지를 피하려 차량 4대가 나란히 횡대로 달린다.

IMG_3228
기행단이 탄 지프가 초원의 길을 내달리고 있다. 일렬로 달리다 앞 차량이 내쏟는 먼지를 피하려 차량 4대가 나란히 횡대로 달린다./사진=최영재 기자
길이 따로 없다. 산도 없고 강도 없고 사방이 터졌으니 가는 곳이 길이다. 칭키즈칸의 기마병단도 이렇게 달렸으리라. 이렇게 나란히 말을 달리며 활을 쏘며 전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그 기마병단이 일으키는 먼지구름과 말발굽 소리, 빗발치는 화살 소리를 상상해 보라. 이 곳에서 일어나는 먼지구름이 크게 일어나 우리나라 국민들이 싫어하는 황사가 된다. 황사의 3분의 2는 고비사막에서, 나머지는 이곳과 서만주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던 12세기, 13세기 무렵에는 탱크와도 같은 기병이 초원에서 횡대로 밀려들면 당해 낼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부여와 고구려처럼 수풀이 울창한 지역에서 말을 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기기도 힘들고 이겨보았자 성과가 별로 없다.

몽골이 만들었던 대원제국이 만주족의 금나라를 끝내 품어안았던 것도 그 까닭이다. 초원 지역의 훈누와 투르크가 고구려나 부여와 동맹을 맺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칭기즈칸이 고려와 형제의 인연을 맺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계속>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