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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재표석] 역대 왕의 기록물 보관 ‘규장각 터’

[서울 문화재표석] 역대 왕의 기록물 보관 ‘규장각 터’

기사승인 2015. 07. 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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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터
◆이름 : 규장각 터 

◆카테고리 : 조선설치기관 

◆설치연도 : 2001 

◆위치 :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 경복궁방향 삼청동길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맞은편 

◆GPS좌표 : 37°34.78´N 126°58.79´E 

◆표석문구 : 역대왕의 기록이나 친필 등을 보관하던 조선시대 관아터. 정조 때 설치되어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으나 광복 후 서울대학교로 그 자료가 옮겨졌다. 

◆표석설명

조선 후기 왕실도서 보관 및 출판과 정치자문 등을 담당하던 국가 기관 

조선초기인 세조 때 잠깐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었다. 1694년(숙종 20) 역대 국왕의 글씨와 작품을 보관하기 위한 규장각의 설치를 다시 시도하여 1776년(정조 1) 비로소 대궐 안에 설치하고,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등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규장각은 우선 영조의 어필, 어제를 봉모당(奉謨堂)을 세워 봉안하고,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였으며 출판 등을 담당하던 교서관을 합쳐서 외각으로 삼았다. 1781년(정조 5)에 청사들 중 가장 넓은 옛 도총부 자리로 옮기고, 강화사고 자리에 강도외각(江都外閣)을 신축하였다. 또 내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국내 문서를 보관하는 서고(西庫)와 중국 문서를 보관하는 열고관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총 3만여 권에 달하는 현재 규장각도서의 기원이다.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나자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였으며 1781년에는 서호수(徐浩修)에 의해 ≪규장총목≫이라는 도서목록이 작성되었다. 관원으로는 내각에 종1품∼종2품의 제학 2명, 종2품∼정3품 당상관의 직제학 2명, 정3품∼종6품의 직각 1명, 정7품∼정9품의 대교 1명이 있었고, 외각에는 당상관으로 겸하는 제조 2명 아래, 정3품 판교, 종5품 교리·겸교리·별좌, 정·종6품 별제, 정7품 박사, 정8품 저작, 정9품 정자, 종9품 부정자 등이 있었다. 내각에는 정식관원 외에 서얼출신의 명망있는 학자로 충원하던 검서관이 있었다. 

각신들은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승지 이상으로 국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젊은 당하관 중에서 선발된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시험하였고, 국왕의 언동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또한 왕과 정사를 토론하였고, 교서를 대신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그 밖의 각종 정책결정이나 편찬, 간행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정조 사후에도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규장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궁내부에 소속되었고, 이듬해 규장원으로 변경되었다가, 1897년에 규장각으로 환원되었다. 

1908년에 근대적 직제로 개편되었으나 1910년에 폐지되었고, 소장도서는 이왕직 도서실에 보관되었다. 이후 1911년에 조선총독부 취조국, 1912년에 학무국,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소장도서가 이관되었다가 1989년에 이르러 서울대학교 안에 독립건물을 마련하여 보관하고 있다.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도 출세의 길이 막혀있던 서얼들에게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내각의 관원인 각신(閣臣)은 삼사의 관원보다 더 요직으로 여겨졌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순한 왕실도서관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었고, 즉위 직후 외척과 환관 등의 세력을 억누르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목적이 달성된 후 규장각은 정치 연구, 자문기관이 되었다. 

◆얽힌 이야기 

노걸대와 박통사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는 한어(漢語)를 비롯하여 이웃 나라의 언어를 익히기 위한 어학교재이다. 책의 기원은 고려시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남아있는 자료는 모두 조선시대의 것이다.

조선시대 역관들은 이들 교재를 이용하여 외국어를 익혔으며, 역과시(譯科試)에도 이 자료가 이용되었다. 노걸대는 한어를 익히기 위한 교재였는데 이후 몽어노걸대, 청어노걸대와 같이 몽골어, 만주어 등을 익히기 위한 교재로도 만들어졌다. 노걸대에 한글로 한어발음을 표기하고 풀어 쓴 것이 번역노걸대, 노걸대언해이다.

노걸대의 기본적인 내용은 조선인(고려인)과 한인(漢人)이 인사하고 묻고 답하고 흥정하는 등 일상적이며 구체적인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노걸대, 박통사 자료의 대부분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1. 이혜숙, 신병주 저, 왕실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조선 시대의 놀라운 기록 문화), 책과함께어린이, 2010

2. 한국학 중앙연구원 http://yoksa.aks.ac.kr/ “규장각(한국사기초사전)”

3.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 “규장각(부가정보 - 노걸대와 박통사)”

4.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정조실록 정조 즉위 년 9월 25일” 

◆찾아가는 길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약 300m정도 걸으면 종로문화원을 지나 경복궁 사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 코너를 돌아 삼청동길을 따라 가다 보면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이 나오는데 그 건너편에 위치 

※도움·출처: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본부·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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