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 극락에 가겠다는 욕심을 먼저 버리거라.

[칼럼] 극락에 가겠다는 욕심을 먼저 버리거라.

기사승인 2017. 04. 24. 08:1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황태영 수필가, '편지가 꽃보다 아름답다' 저자, 인사동 '희여골' 대표

물고기의 IQ는 0.3이라고 한다. 낚시꾼이 미끼를 던지면 물고기는 입질을 한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싯바늘에 걸려 잡혀가는 것을 보고서도 입질을 멈추지 않는다.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워하는 동료의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입질을 한다. IQ가 0.3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IQ도 물고기와 별반 다르지가 않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추한 모습을 보고서도 또 다시 뇌물을 먹는다. 이런 저능아의 모습은 동서고금에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또 계속 반복되어질 것이다. 물고기건 사람이건 탐욕은 끝이 없다. 그러나 탐욕으로 쌓은 부가 곧 행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해외여행이 어려웠고 큰 자랑이었던 1980년 한 지인이 진시황릉에 갔다. 산을 오르고 또 오르며 한참을 올라도 황릉은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궁금하여 옆에 있던 중국 분에게 물어 보았다. “진시황릉이 어디 있습니까?” 중국분이 답했다. “당신이 딛고 있는 이곳이 바로 진시황릉입니다.” 그 지인은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작은 우리나라 능을 생각했었는데 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능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황제들은 천문학적 세금을 무덤조성에 사용했다. 무덤은 산처럼 거대했고 온갖 진귀한 부장품들이 가득 채워졌다. 살아서는 불로초를 찾았고 죽어서는 시신이 썩지 않는 약물과 보석으로 영생을 꿈꾸었다. 그러나 화려하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황릉은 대부분 처참히 도굴, 파괴되어졌고 폐허가 되기도 했다. 진귀한 보석이 많은 무덤일수록 도굴꾼들에게는 더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특히 심했던 것은 서태후의 무덤 도굴사건이었다. 서태후는 살아서는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였고 죽어서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으로 영생을 꿈꾼 철의 여인이었다. 중국의 군벌 손전영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가장 먼저 서태후의 무덤에 손을 대었다. 서태후의 입에는 야명주가 있었다. 야명주는 밤에도 스스로 빛을 내며 더울 때는 몸을 서늘하게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해주는 희귀한 구슬이다. 죽은 사람의 입에 물리면 천년이 지나도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한다. 야명주를 꺼내려고 입을 벌리자 구슬이 시신의 목구멍으로 들어가 버렸다. 군인들은 야명주를 꺼내기 위해 서태후의 입을 찢고 시신을 칼로 심하게 욕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석을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서태후의 의복과 알몸 전체를 샅샅이 수색하며 시신을 유린하였다. 보석으로 영생을 꿈꾸었던 그녀는 보석 때문에 궁녀만도 못한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원의 황제들은 도굴을 당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들은 몽골의 전통에 따라 봉분을 세우지 않았고 비장을 하여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도 도굴의 참화는 적다. 무덤에 값나가는 부장품을 거의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생하는 능은 화려한 능이 아니라 간소한 능이다. 권력에 취했을 때는 그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서고금 그 어떤 무소불위 영원을 꿈꾸었던 권력도 다 끝이 있었다. 영생을 꿈꾸던 황제들만이 물고기처럼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삶의 지혜는 부장품이 많았던 황제들이 아니라 27년 동안 총리로 중국을 이끌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서 배울 수 있다. 중국은 문명고국으로 금은보화가 넘쳐나고 땅도 한없이 넓다. 그러나 최장수 총리였지만 저우언라이는 한 푼의 저축도 한 평의 땅도 남기지 않았다.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자녀 10명을 양자로 보호하고 키웠지만 자신의 친자식은 한명도 낳지 않았다. 중국인민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는 중국 전토에 자신의 뼈를 뿌리도록 하고 무덤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는 지금도 전 중국인의 가슴에 가장 존경하는 ‘인민의 벗‘으로 각인되어져 있다. 영생을 꿈꿨던 황제들은 능욕 속에 사라졌지만 부장품 하나 없이 사라졌던 저우언라이는 빛이 되어 영생하고 있다.


어떤 불자가 노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어떻게 살아야 극락에 갈 수 있습니까?” 스님이 답했다. “극락에 가겠다는 욕심을 먼저 버리거라.” 영생을 꿈꿀 때는 영생을 얻지 못했지만 영생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오히려 영생을 얻게 되었다. 가끔 마음이 답답하면 국립묘지를 산책해 보는 것도 좋다. 살아서 벌이던 불면의 아귀다툼과 애지중지하던 부귀영화가 스치는 바람만큼도 흔적이 없다. 세상은 불평등하다기 보다는 어쩌면 각자 주어진 재능이 다른 것일 뿐일 수도 있다. 상대의 재능을 탐하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한 세상 소풍은 즐겨볼만 하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으로 평등해진다. 탐욕의 불안보다 마음의 평화가 복되고 값지다. 예전에는 말을 기르는 집에서는 닭과 돼지를 기르지 않았다. 배려하고 정을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복된 삶은 없을 것이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