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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한국 복싱계의 페스탈로치’ 박형춘 감독의 라이프스토리

[조영섭의 복싱비화]‘한국 복싱계의 페스탈로치’ 박형춘 감독의 라이프스토리

기사승인 2019. 01. 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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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최장수국가대표 코우치..박형춘선생
최장수 복싱국가대표 코치를 역임한 박형춘선생 /제공=조영섭 관장
지난달 서울모처에서 서울복싱연맹 회장 취임식에 참석한 필자는 아주 귀한 분을 뵐수 있었다. 아마복싱 현대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박형춘 선생이었다.

편의상 존칭은 생략한다. 박형춘은 구슬땀을 흘리며 쉬지않고 훈련하는 선수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채찍보다는 따뜻한 사랑과 애정으로 감싸며 지도하고 격려했던 ‘복싱계에 페스탈로치’로 불렸다. 언젠가 경기장에서 경남대를 졸업한 민병용을 만나자 “선생님”하면서 눈물을 쏟아낸 일화는 박형춘의 자애로운 지도자상을 함축시킨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박형춘은 18년동안 엘리트 체육의 산실인 한국체대·경희대 복싱 감독을 거쳐 거쳐 태릉선수촌에서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를 엮임한 올해 팔순인 원로 복싱인이다. 1957년 전남공고 1학년때 호남체육관 이재인 관장 문하에 입문해 성의경배 등에서 우승하며 주목을 받지만,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에서 김덕팔에게 고배를 마시자 1963년 군에 입대했다. 그는 원주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인생에 전환점을 맞이했다. 틈틈이 미군들이 운동하던 체육관에서 몸을 풀던 박형춘은 강원도 대표로 44회 전주전국체전에 전격출전, 미들급 결승에서 경북의 김해동을 꺾고 강원도의 유일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원주복싱은 홍천이나 춘천에 비해 전력이 약해 강원도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박형춘의 전국체전 금메달로 인해 복싱 볼모지에 부활의 신호탄이 터졌던 것이다. 이후 절제된 언행과 겸손함을 지닌 박형춘은 김병극 부대장과 강원복싱의 대부 송영수 사범의 총애를 받으며 입지를 구축했다. 이들의 베려 속에 일과가 끝나면 미군부대 체육관에서 훈련을 하면서 인근의 공설운동장 체육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원주대성고 1학년 소년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반항기가 있던 이 소년을 체계적으로 지도하자 반듯한 성품으로 탈바꿈하면서 기량마져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5년 후 1968년 멕시코 올림픽 LF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지용주다. 1965년 제대를 한 박형춘은 원주에 정착을 했다. 원주시청에 근무하면서 원주대학 야간을 졸업한데 이어 경희대 교육대학원 체육학과에서 석서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현역선수로 활동하면서 44회, 47회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지도자로서도 박종목, 이명호, 구본옥, 황광옥, 황광렬, 이상덕 등 대표급 선수를 꾸준히 배출하며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야말로 1인 4역을 완벽하게 수행한 것이다. 특히 구본옥은 헤비급에서 국가대표 김옥태를 꺾으며 각광을 받았고 이명호, 박종목, 이두명은 후에 지도자로 변신, 민들레 홀씨 퍼지듯 제자들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은 신창석, 김유현, 이성목, 전인덕, 김정보, 신명수, 이병국 등 걸출한 복서들을 탄생시켜 원주복싱에 명맥을 유지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사본 -70년 방콕 아시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획득한 박형춘과 지용주(왼쪽부터) /제공=조영섭 관장
박형춘은 1964년 올림픽과 1966년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숙적 김덕팔과 이금택에 고배를 마시지만 그의 도전은 계속되었고 1968년도 올림픽 LH급에서 마침내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하지만 중량급이란 이유로 M급 김승미와 함께 제외되면서 본선진출이 좌절된다. 1970년 4월 만 30세의 박형춘은 복싱에 입문한지 13년만에 첫 태극마크를 달고 마닐라에서 벌어진 제4회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결승에서 파키스탄의 사워르에 2회 KO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해 12월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값진 은메달을 따냈다. 수제자인 지용주도 플라이급으로 동반출격 금메달을 획득하며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 해 대통령 국민포장(國民褒章)을 받은 박형춘은 13년간 정들었던 링을 떠난다. 1971년부터 원주에서 지도자생활을 하던 박형춘은 1977년 5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주도적으로 창단된 한국체대 복싱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LW급 김인창 W급 황충재가 금메달을 획득하자 지도력을 인정한 한국체대 류근석 총장은 박형춘에게 특별공로상을 수여했다. 1979년 황충재가 동국대로 편입할때는 미비한 서류를 잘 보강해 제자가 편입에 차질이 없도록 세심한 베려를 해주는 등 뒷모습이 아름다운 은사이기도 하다. 황충재는 “탁월한 지도력과 함께 가슴이 따뜻한 존경하는 은사님”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사본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출정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출정식 때 박형춘 선생(뒷줄 오른쪽 2번째) /제공=조영섭 관장
제자들을 좋은방향으로 이끄는 지도자는 사다리와 같다. 자신의 두발은 땅에 있지만 머리는 벌써 높은곳에 있기 때문이다. 1981년부터 경희대 감독으로 부임해 김유현을 발탁·조련한 박형춘은 1982년부터 1994년까지 태릉선수촌 복싱스태프로 근무하면서 한국아마복싱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현장에서 목도한 몇 안되는 복싱인중에 한분이다. 특히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신준섭의 전담 트레이닝을 맡아 그가 금자탑을 쌓는데 소리없는 조력자 역할을 했다

박형춘은 신준섭의 숨은 비화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선수촌 숙소에서 저녁 10시에 선수단의 취침시간이 되면 신준섭의 잠자리는 공석이 되어 있었지. 야음을(夜陰)을 틈타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야. 준섭이의 금메달은 운명에 저항하는 그에게 신(神)이 길을 비껴준 것 같아. 또 1983년 로마 월드컵과 19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회득한 신준섭이 1986년 리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대회 우승자인 독일의 헨리 바스케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3-2로 판정패해 트리플 크라운 달성이 무산된 경기가 가장 안타까워”라고 회고했다.
사본 -박형춘선생 김성은 감독 신준섭(좌측부터)
박형춘 선생, 김성은 감독, 신준섭 선수(왼쪽부터) /제공=조영섭 관장
그의 제자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1982년 체육훈장 백마장, 1984년 체육훈장 거상장, 1986년 대통령 표창, 1988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은 그는 현재 원로복싱회 부회장을 맡고있다. “링 위에서는 주먹을 쥐고 싸우지만 밖에서는 그 두 손이 상대방의 가슴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손이 되어야 했다”고 역설하시는 그의 지도철학은 한국 아마복싱의 큰 물줄기가 되어 유유히 흐를 것이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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