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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소외] ③독일 사회법원에는 ‘세 가지’가 없다

[소송 소외] ③독일 사회법원에는 ‘세 가지’가 없다

기사승인 2023. 08. 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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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달리 법대(法臺) 없어 판사와 눈높이 같아
비용 부담·형식 제약 없어…"편지 보내 소송 가능"
당사자 입증부담도 없어…"판사가 직접 사건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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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사회법원 법정 안 전경/김임수 기자
살면서 소송이 필요할 때는 언제일까? 누군가에게 폭행 혹은 사기를 당했을 때만은 아닐 것이다. 기초보장·의료급여가 갑자기 중단됐다거나 회사에서 부당해고 된 경우, 장애가 있어 먹고살 길이 막막하지만 관계기관이 도움을 거절했을 경우에도 국민은 소송을 통해 바로 잡을 권리가 있다. 사회적 약자의 법률구조에 꼭 필요한 '사회보장소송'은 대한민국에서 통계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지만 독일은 아예 사회보장소송만을 다루는 법원이 별도 존재한다. 아시아투데이가 '소송 소외' 해법을 구하려 독일로 떠난 이유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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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0일 오전, 독일 베를린 중앙역에서 도보 5분 남짓.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안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가기 시작했다. 겉만 봐서는 용도를 알 수 없었던 이곳이 바로 베를린 사회법원(Sozialgericht Berlin)이다. 1874년 지어진 건물은 철도 관리 회사와 국가 보건부 사무소로 쓰이다가 1968년부터 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 베를린 사회법원을 취재하러 오는 건 처음입니다." 이날 기자를 안내한 마르쿠스 호베(Marcus Howe) 공보담당 판사가 말했다. 호베 판사는 "베를린 사회법원은 현재 115명 직업판사가 일하고 있고, 1명당 1~2개 분야의 사회보장사건을 전담한다"며 "모든 소송은 1명의 직업판사와 2명의 명예법관으로 진행하는데, 명예법관은 변호사 등 전문 법조인이 맡기거나 시민단체에서 추천받은 인물이 참여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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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사회법원 311호 법정. 법대가 없어 판사를 같은 시선에서 마주 볼 수 있다./김임수 기자
◇ 법정에 '법대'가 사라졌다
베를린 사회법원에서 가장 규모가 큰 311호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띈 것은 판사석이었다. 1미터(m) 남짓한 법대(法臺)로 판사를 올려다봐야 하는 우리와 달리 독일 법정은 아무런 턱이 없었다. 호베 판사는 "아주 예전에 지어진 법원 건물을 제외하면 독일 법정은 대부분 법대가 없어 판사를 같은 시선으로 본다. 이 법정은 시민들을 위한 공청회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고 전했다.

지방·행정·가정법원 등으로 나눠진 우리와 달리 독일은 일반·행정·재정·노동·사회법원 5개로 나뉘어 있다. 대법원에 해당하는 연방최고법원 역시 5원화 돼 있다. 2~4년 주기로 판사가 법원을 옮겨 다니는 우리와 달리 독일 판사들은 다른 분야 법원으로는 거의 이동하지 않고, 평생 한 분야의 재판만 담당하며 '전문성'을 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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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법원 안 도서관.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김임수 기자
기초보장, 공공부조, 실업급여, 장애판정 등 주로 사회적 약자가 국가나 기업을 상대로 하는 사회보장소송의 경우 한국은 소(訴) 제기도 쉽지 않고 소송에서 이겨도 실익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독일은 사정이 다르다. 2021년 접수된 독일 법원 전체 사건 중 9.6%가 사회법원을 통한 사회보장소송일 정도로 일반적이다.

호베 판사는 "2022년 1만8000건 정도의 소송이 베를린 사회법원에 접수됐다"며 "분야별로 파일 색상이 다른데 초록색 파일인 기초보장 관련 소송이 약 36%로 가장 많고, 건강보험 관련 소송 약16%, 사회부조·난민 약 12%, 연금보험 11.5%, 중증장애인 관련 소송은 8.7% 정도의 비율"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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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베를린 사회법원 분야별 소송 비율/아시아투데이 디자인팀
◇ "독일은 '돈 없어 소송 못 한다' 인식 없어"
독일 사회보장소송은 당사자가 개인이라면 대부분 무료로 진행하고, 기업이나 병원이 먼저 소송을 제기할 때만 비용이 발생된다. 기초수급자나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라면 법원이 대신 변호사를 구해 주고, 심지어 시민단체를 통해 변호사가 아닌 사람에게 소송대리를 맡길 수도 있다. 비용 부담을 없앤 이유는 사회법원을 사회적 약자를 법으로써 보호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 사회법원은 하르츠 개혁(독일 정부가 2002~2005년 추진한 노동 개혁) 당시 실업자가 급증하고 분쟁이 늘면서 정부와 노동자 사이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호베 판사는 "베를린 사회법원도 하르츠 개혁 이후 소송 건수가 증가했는데, 장애가 있거나 몸이 아픈 이들이 빠르게 기초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는 등 승소율이 높았다. 이 과정에서 판사도 많이 고용됐고, 사회보장소송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고 전했다.

비용뿐만 아니라 소송 형식도 자유롭다. 호베 판사는 "소송이 필요하면 법원에 편지를 보내도 되고, 글을 못 쓰는 분은 법원에 직접 와서 구두로 이야기하면 소송을 시작할 수 있다.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수화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라며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변호사를 쓸 수도 있다. 변호사 비용은 승소 가능성이 있고,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이라면 국가가 지원한다. 독일은 변호사 비용이 법정화돼 있고 비교적 저렴해 부담이 적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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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호베 판사가 아시아투데이와 인터뷰하고 있다./김임수 기자
◇ 법원에 '입증 책임'…"법원은 시민이 권리 펼치는 곳"
독일 사회법원은 소송 관련 사실 및 증거 수집을 소송 당사자가 아닌 법원이 부담하는 '직권탐지주의'를 채택하고 있기도 있다. 국내 행정소송법에서도 '직권심리' 규정이 있지만 대체로 '변론' 중심으로 이뤄지고 법원이 직권으로 판단할 때도 당사자가 관련 내용을 제출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다.

호베 판사는 "사회법원 판사들은 사건을 직접조사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국가의 잘못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소송이 제기됐기 때문"이라며 "판사가 직권으로 증인을 부르는 등 재량 범위가 넓고 소송 당사자들에 입증 부담을 지지 않게 한다. 그래서 다른 법원에 비해 소송 기간이 길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호베 판사는 사회법원의 역할에 대해 "시민이 권리를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사회법원에서 이뤄지는 소송들은 시민 대 단체나 시민 대 국가 구도의 사건이 많다. 최대한 시민 관점에서 바라보고, 관련 기관들이 법을 어기지 않도록 통제하는 역할도 한다. 이를 통해 시민이 국가를 더 믿을 수 있도록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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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사회법원 장애인 전용 통로. 길이 아래로 이어져 통행이 훨씬 자유롭다./김임수 기자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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