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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식 칼럼] 2차 세계대전 종전 앞당긴 오펜하이머의 시련

[주은식 칼럼] 2차 세계대전 종전 앞당긴 오펜하이머의 시련

기사승인 2024. 04. 15.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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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원자탄을 최초로 개발하여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겼다. 그는 당시까지 없었던 신물질을 개발하였음에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수많은 인류를 죽일 수 있는 원자폭탄을 개발하였기에 "인류 최대의 행복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는 노벨상 제정 취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 원폭투하를 반대했고 대신 사람이 없는 고도에 원폭을 터트려 위협만 하여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자고 주장했다.

노벨이 노벨상을 제정한 이유는 탄광이나 굴을 파는 데 사용되는 다이너마이트가 전쟁터에서 '죽음의 상인'으로 자신이 불리는 것에 실망하여 1896년 제정, 5년이 지난 1901년부터 유산을 기금으로 상을 수여해 왔다. 그는 무시무시한 살상무기를 만들면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노벨의 생각과 반대로 흘러갔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고의 예지능력을 보유한 전략가다. 프로는 '먼저' 그리고 '메테우스'는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로 프로메테우스는 선지자를 뜻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듯이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핵을 선사해서 '원폭의 아버지'로 불렸지만 원폭을 통제할 힘은 없었던 개발담당 과학자였다. 핵무기 개발 후 그가 당한 고충은 프랑스의 드레퓌스사건과 닮았다.

◇간첩 누명 쓴 드레퓌스
드레퓌스는 보불전쟁 이후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 애국주의 때문에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프랑스군 포병 대위였다. 그가 간첩혐의로 체포되자 프랑스 사회는 무죄 주장파와 유죄 주장파가 극렬하게 대립했다. 범죄행위가 명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태인으로 필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유배됐는데 작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유명한 글을 신문에 써서 사건의 부도덕성과 증거 조작을 고발한 후 진범이 밝혀져 드레퓌스는 마침내 무죄 석방됐다.

◇수소폭탄 개발 반대로 간첩혐의 받은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원폭투하로 수많은 사람이 죽자 죄책감을 느끼고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에 다른 과학자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설득했고 이와 같은 반대운동이 폭탄의 개발을 지연시켰다고 이적 간첩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다. 당시 매카시즘 선풍으로 원자력에너지 위원회 의장 스트라우스가 오펜하이머를 고발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평판을 완전히 몰락시키지 않으면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핵무기 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좌익 및 공산주의자의 원폭개발 참여 허용, 샌프란시스코 공산당 기부 등으로 원자력에너지위원회의 고발로 청문회에 회부되고 재판을 받았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증거 수집을 위해 불법도청 하였다. 이 도청 녹취록은 위원회 조사에서는 문제없이 사용되었으나 법정에서는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유태인 집안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 혐의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했고 미국에서는 오펜하이머를 간첩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국가정책에 반대한 과학자의 말로
오펜하이머 사건은 외양으론 한 명의 과학자가 파문당한 사건이었지만 과학자들이 국가정책에 도전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오펜하이머의 혐의 중 비밀정보를 적에게 건네준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조사위원회 역시 이러한 혐의는 무죄를 선고했다. 오펜하이머는 넓은 의미의 좌파였다. 그는 소련 체제의 미몽에서는 깨어났지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진보주의적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 그룹에 참여하였다.

첩보활동을 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더라도 미국의 핵무기 의존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1954년의 오펜하이머에 대한 안보청문회는 냉전 초기 미국의 공공영역이 급속히 좁아지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큰 영향력을 지닌 인사였지만 안보청문회 이후 공인으로서 존재감이 퇴색했다. 이 사건으로 오펜하이머의 모든 영광이 사라졌다.

청문회 이후 오펜하이머는 '열린 마음'이라는 에세이집을 출판했다. 이 책은 1946년 이후 행했던 8개의 강연을 엮었는데 핵무기, 과학, 그리고 전후 문화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트루먼 행정부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소련에 대한 핵외교의 일환이었고 이미 패배한 적에 대하여 원폭을 사용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군부가 아닌 전쟁에 직접 책임이 없는 적국의 일반 국민을 상대로 원폭투하를 했다고 생각했다.

◇논란 불구 역사적 인물로 자리매김한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1930년대 미국 이론물리학의 대표학자였고 정치 활동가였으며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자 정부의 저명 자문관이었다. 또한 유명한 대중지식인이자 매카시즘 광풍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삶은 복잡다단하여, 폭넓은 반향을 야기해 그가 죽은 뒤 수많은 책과 연극, 학술논문으로 되살아났고 최근 오펜하이머라는 영화로 상영되어 널리 그의 행적이 알려졌으며 다양한 매체 덕분에 그는 미국과 세계사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 독, 일, 미 각국이 먼저 핵을 개발하기 위해 각축했다는 사실이다. 영국은 투브 엘로이라는 암호명으로 케번디시 연구소를 중심으로 핵개발 가능성을 타진했고, 일본은 니시나 요시오가 니고연구소에서 핵 개발에 안간힘을 썼으나 우라늄 동위원소 농축 실패로 연구가 중단되었으며, 독일은 우란 연구소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중수를 농축시키고자 했으나 핵심자원의 부족으로 핵개발에 실패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아인슈타인의 제안으로 핵 개발을 시작했는데 개발의 총책임자가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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