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빨간머리 앤 그 후 이야기, 막내딸 리라와 세계대전에서 죽은 아들 월터까지

빨간머리 앤 그 후 이야기, 막내딸 리라와 세계대전에서 죽은 아들 월터까지

기사승인 2014. 10. 31. 09:22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워킹하며 토킹하며] 세계여행 -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편②
에이번리에 들어온 앤은 특유의 엉뚱함으로 주목을 받습니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에이번리 사람들은 빠져드는데요. 그 중의 한명이 앤의 남편이 된 길버트죠.

모든 여자아이들의 우상이었던 길버트. 그가 볼품없이 마른 주근깨투성이 빨간 머리 여자아이에게 빠진 이유는 뭘까요?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앤. 그녀의 사랑과 결혼, 6남매 육아까지 그녀의 삶은 계속됩니다.

특히, 이번에 소개할 내용은 시대적 배경이 세계 1차 대전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더욱 실감날 겁니다. 무서운 전쟁의 회오리 속에 빠져 그녀의 아들들은 출전을 결심하고, 한 아들은 전사하게 되지요. 앤은 이제 마냥 꿈과 아름다움에 들뜨고 즐거워했던 그 시절의 앤이 아닙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막내 딸 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리라가 태어나고 자란, 이제는 앤이 아닌 리라의 작은 섬인 프린스에드워드 섬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KEJ_PEI_Cavendish_Green Gables114
앤의 마지막 딸 리라. 그녀는 어머니와는 또다른 굳세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 사진제공=/김은정
△리라의 첫 파티와 슬픈 예감

꿈꾸는 듯한 담갈색의 큰 눈, 우유빛 피부, 우아한 눈썹, 슬기로운 표정, 붉은 빛이 도는 갈색 머리...앤과 길버트의 막내 딸 열다섯 살의 리라는 엄마와 많이 닮아 있었다.

앤과 길버트가 가정을 꾸린 노변장 정원 잔디 위에는 황금빛 햇살이 연못 같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고, 리라는 큰 소나무 아래 매어 둔 해먹 위에 누워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런 평안 속 긴장된 공기가 밑바닥에 흐르고 있었으나,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리라만이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의학박사가 된 길버트는 매일 우울한 얼굴로 신문을 읽었고, 맏아들 젬과 둘째 아들 월터는 신문 뉴스에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보였다. 독일의 전체주의에 반발하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있었다.

리라는 자신의 첫 파티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극히 행복했고, 세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길에는 군데군데 분비나무와 전나무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예고됐던 슬픈 이별은 그녀를 더 이상 행복감에 젖은 소녀인 채로 놓아두지 않았다.

KEJ_PEI_Cavendish_Green Gables133
저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을 전쟁이라는 큰 불행이 송두리째 뒤흔들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암담한 미래가 펼쳐진다. 사진제공=/김은정
△젬과 월터의 1차 세계대전 출전

노변장의 뒷마당은 상수리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찬란한 햇빛을 받고 상수리나무들은 잔뜩 싱그러움을 뽐냈고, 그 숲을 지나면 <무지개 골짜기>가 나타났다. 8월의 오후는 눈이 부실 지경의 푸른 하늘 아래 펼쳐졌다.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노변장에 울려 퍼졌고, 리라는 어머니 앤이 무슨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앤의 얼굴이 금방 창백해졌기 때문이다. 오빠 젬은 흥분해 눈이 빛나고 있었다.

“거리에서 의용병을 모집하고 있대요. 저는 오늘 저녁 응모하러 갔다오려고 해요.”

“오, 안된다. 안된다. 젬 아가. 내 아들아...”

리라는 ‘내가 남자라면, 물론 나도 갈 테야! 의문의 여지는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 슬퍼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오빠 월터와 골짜기에 앉아 얘기했던 밤, 참나무 숲 위에 걸려 있던 비단 같던 구름 사이로 저녁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날 밤이 지나고 젬에 이어 월터마저 전장으로 떠났고, 노변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images3
적군 아군할 것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된 전쟁이었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출처=/위키피디아
△월터의 죽음 “리라, 마이 리라, 안녕”

당시 누구나 그랬듯이 리라는 사랑하는 사람도 전쟁터로 떠나보냈다. 리라는 얼굴을 진홍빛으로 물들인 채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를 마지막으로 그를 보냈다. 길이 구부러지는 모퉁이에 서서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리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역 뒤에 있는 전나무숲은 서리에 뒤덮여 있었고, 차디찬 달은 서쪽의 눈 덮인 벌판 위에 걸려있었다. 그래도 아침은 온다. 리라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 방법 밖에 없었다.

맑고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무지개 골짜기>. 젬의 휘파람 소리, 월터의 요들을 부르는 소리, 쌍둥이 언니인 낸과 다이, 셋째오빠 샤아리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노변장의 아침은 방울새의 지저귐 소리가 대신하고 있었다.

오빠들이 출전한지 2년이 되던 해, 전쟁은 계속됐고 월터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시인이 되겠다고 선포했던 월터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아버지가 핏기 없는 수척한 얼굴로 리라에게 와서 월터가 전사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 리라는 인사불성이 되어 아버지 팔에 쓰러져 오랜 시간 아무런 고통도 의식하지 못했다.

“너의 얼굴에는 아직 웃음이 남아있을까, 리라? 내가 ‘저 세상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더욱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내일 산꼭대기를 넘을 때, 나는 너를 생각할거야. 너의 웃음을...리라, 마이 리라.” 월터의 죽음 소식 후 전달된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새벽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리라는 일어나서 창가로 갔다. 창 아래에는 큰 사과나무가 있었다. 여러해 전 월터가 심은 것이었다.

“우리의 희생이 너무나 커요.” 리라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들은 자신을 바치는 것만으로 만족하겠지만, 우리는 오빠들을 바쳤는걸요.”

images4
세계대전에 출전한 젊은이들은 근거없는 낙관론을 가지고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 믿었다. 출처=/위키피디아
△샤아리의 입대와 젬의 행방불명...다시 한해가 가고

1917년 노변장의 가을은 특히 괴로운 계절이었다. 건강이 나빠진 어머니의 회복은 좀처럼 차도가 없었고, 식구들 모두의 마음은 슬프고 쓸쓸했다. 그러나 그 슬픔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다들 명랑한 체했다.

집에 남은 마지막 젊은 남자이자 리라의 셋째 오빠 샤아리는 18살이 되었다. 햇볕에 그을려 혈색이 좋은 건전한 젊은이인 샤아리는 정적이 가득한 노변장에 다시 한 번 슬픔을 안겼다. 공군에 입대한 것이다.

‘월터는 캐나다를 위해서 죽었다. 그러니 나는 캐나다를 위해서 굳세게 살아야 한다.’ 리라는 다시 다짐하고 다짐했다.

1918년 5월초 바람과 햇빛이 <무지개 골짜기>에서 희롱을 하고 있었다. 단풍나무숲은 금색으로 물들었고 새파란 항구에는 잔물결이 흰 파도가 되어 부서지던 날, 젬 오빠가 부상당한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고통은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KEJ_PEI_Lake Of Shining Waters016
4년만에 지옥같았던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감회는 어땠을까. 사진제공=/김은정
△4년만에 끝난 전쟁과 벅찬 감사

“지금 도착. 독일에서 도망쳐왔다. 무사함. 자세한 말은 편지로 하겠음. 제임스 브라이스”
그해 9월 네덜란드에서 이렇게 전보가 왔을 때 리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 앤은 리라의 표정만으로도 내용을 짐작했다. 앤은 자신의 방문 앞에 서서 처녀 때부터 입던 장미꽃 옷을 입고, 머리를 한 줄로 굵게 땋아 내리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젬에게서 소식이 온 거지?”

창 밖에 진홍색으로 물든 단풍나무숲이 빛을 받아 출렁이던 날, 두꺼운 구름 사이에서 태양이 얼굴을 내밀던 그 순간 노변장의 사람들은 전쟁의 종말을 통보받았다. 길고 길었던 4년이었다.

큰 오빠 젬은 돌아왔다. 그는 얼굴이 청동색으로 탔고, 이마에 흩어져 내린 고수머리에는 흰 머리카락도 섞여 있었지만 건강해보였다. 그를 4년간이 기다리며 힘없이 누워있기만 했던 개 먼디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의 주변을 뛰어다녔다.

리라가 사랑했던 이도 돌아왔다. 키가 크고, 눈도 머리도 까만...그러나 까맣게 탄 볼에 처음보는 가늘고 하얀 상처가 생긴 사람...
리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c110007_053rr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바닷가는 붉다.토양이 산화철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질 무렵이면 환상적인 붉은 빛으로 변한다. 사진제공=/캐나다 관광청
소설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4년. 그 길었던 시간동안 전세계 청년들은 적군이 되어 싸웠습니다. 낙관적인 청년들은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고, 누구의 승리라고 할 수 없는 전쟁은 빛나는 청년들의 얼굴에 상처와 주름을 안겨주었지요.

그들을 기다리던 여성들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요. 사랑하는 이의 변한 얼굴을 마주한 여성들, 자신의 사랑스럽던 아들의 죽음 소식을 접한 어머니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리라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요.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중년이 된 리라에게 또다시 닥쳐온 전쟁. 그녀는 어떻게 견디어내고, 현명하게 삶을 꾸려나갔을까요. 상상해보세요. 우리들의 삶은 전쟁만큼 힘든가요? 전쟁 같더라도 꿋꿋이 버텨야하는 이유, 다들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메모: 프린스 아일랜드 가는 길

지금은 변했을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6월이나 7월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겨울에는 바다가 얼어버릴 정도로 춥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겨울에는 볼거리도 없고, 거리에 대중교통도 끊깁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