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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고달픈 짐] <상> 실버택배원 서씨 할아버지의 하루

[인생 2막 고달픈 짐] <상> 실버택배원 서씨 할아버지의 하루

기사승인 2014. 11. 1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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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9주년] 평균 연령 70대, 6·25 전쟁 등 한국 역사 관통한 이들이 이제는 실버택배원으로 제2의 인생 시작
"한 달 평균 60만원 수입, 하루 수십km 이동하지만 손주 얼굴 생각하면 힘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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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차 실버택배원 서상보씨(76)가 4일 오전 지하철 안에서 다녀 온 거래처 상호·전화번호·경로 등을 수첩에 기록하고 있다. / 사진=김종길 기자
“하루 3만원…그래도 손주 얼굴 생각하면….”

4일 오전 8시 50분 서울 종로구 종로시니어클럽 지하철택배 제1사업단 사무소의 풍경은 그야말로 분주하다.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뉴스 소리,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커피포트에 물 끓는 소리가 한 데 뒤섞이는 사이 대기 중인 40여명의 실버택배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누는 대화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운다.

“길을 잘 찾아가야지. 저번에 알려주지 않았어요?” “몇 군데는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이곳에 모인 실버택배원들의 평균 연령대는 70대. 최고령자의 나이가 84세, 가장 젊은 택배원의 나이도 환갑을 훌쩍 넘긴 67세다.

이들 대부분은 6·25 전쟁을 비롯해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굵직굵직한 한국의 역사를 관통, 중장년 시절 국가 성장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이들의 화려했던 청춘도 이제는 지난 이야기. 이들에게도 새로운 직장에서 익숙지 않은 일에 적응하는 것은 지난날의 훈장과는 또 다른 시작이다.

오전 9시 20분 Y상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팀장이 순번 게시판을 확인하더니 서상보씨(76)를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거래처 상호와 전화번호만 달랑 적힌 쪽지 한 장을 건넨다.

실버택배원으로 일한 지 1년이 갓 넘은 서씨는 팀장에게 건네받은 쪽지를 들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선다. 그는 어깨에 멘 작은 보조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펼치며 쪽지에 적힌 거래처 상호를 찾아본다.

서씨의 수첩에는 수많은 거래처 상호와 전화번호, 경로 등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돼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장 가야할 거래처 상호는 적혀 있지 않았다.

“똑같은 상호가 있는데 지역이 달라, 그럼 전화를 걸어 물어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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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택배원 서상보씨(76)가 4일 오전 거래처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묻고 있다. / 사진=김종길 기자
길을 묻기 위해 거래처에 전화를 건 서씨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사장님, 수고가 많습니다”였다.

“택배가 쉬운 것 같아보여도 할 일이 정말 많아. 일단 전화를 친절하게 걸고 받는 것은 기본, 경로를 제대로 확인해야 하고 거래처에서 받은 물품을 빠른 시간 안에 고객에게 전달하고 한번 다녀온 곳은 기록을 남겨야 돼.”

오전 9시 40분 서울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Y상사를 찾은 서씨는 고객에게 전달할 물품과 함께 택배비 9000원을 받았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택배비는 거리에 따라 5000원에서 3만 5000원까지 다양하다. 실버택배원들이 보통 하루 2~4건의 물품을 배달, 건당 7000~8000원의 택배비를 받는 것으로 미뤄 이들의 일당은 2만5000~3만원 꼴로 추정된다.

“급여는 1주일마다 정산되고 거기서 수수료 15%를 떼지. 수수료 떼면 보통 한 달에 60만원 정도 번다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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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택배원 서상보씨(76)가 4일 오전 거래처로 향하기 위해 지하철 노선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 사진=김종길 기자
사무실이 있는 창신동에서 신당동으로, 다시 신당동에서 구로동까지 이날 오전 서씨가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는 무려 20여km, 지하철 18개역에 달한다. 대부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지만 이 정도 거리면 웬만한 성인 남성도 쉽게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

실버택배는 보통 지하철을 통해 물품을 배달한다. 지하철은 65세 이상 무료승차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에 해당하는 실버택배원들은 되도록 버스·택시 등 다른 교통편을 이용하지 않으면서 지출을 줄인다. 다만 거래처나 고객의 집·사무소가 지하철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이들은 그만큼 먼 거리를 두 다리로 걷거나 다른 교통편을 이용해야 한다.

“늙었다고 집 안에만 있으면 절대 안 돼, 나도 처음 3개월은 길도 많이 헤맸고 그러다보니 많이 걸을 수밖에 없어 힘들었지만 이제는 인이 박여서 그런지 걸을 만해. 가끔 예의없이 우리를 하대하는 거래처 사장님이나 고객을 상대할 때가 있지. 하지만 이 일이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내가 더 친절히 그들을 대할 수밖에 없어.”

1년차 실버택배원 서씨는 이동 중에도 절대 쉬지 않는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2~3개의 수첩에 나눠 방금 다녀온 거래처의 상호·전화번호·경로 등을 기록하는 것이다.

“자꾸 잊어버리니까 반복해 적으면서 외워두려고 하는 것도 있고, 같은 내용을 이곳저곳 적어두면 수첩을 하나 분실했을 때 염려할 필요도 없고 찾기도 쉬우니까….”

짬이 나면 서씨는 책이나 수첩에 정리해둔 글귀를 읽는다. 서씨의 또 다른 수첩에 정리된 글귀 대부분은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서씨가 추천해 준 글귀의 대강은 이렇다.

‘희망의 등불이 꺼질 때 인생은 어두운 밤처럼 캄캄해진다. 신념의 기둥이 무너질 때 우리는 병자처럼 약해진다. 용기의 샘이 메마를 때 우리를 전진할 기운을 잃어버린다. 산다는 것은 희망을 갖는 것이다.’

서씨는 실버택배를 시작하기 전 출판업계에 종사했다. 정년퇴임 후에는 최근 인권과 처우 문제 등으로 논란이 된 아파트 경비원을 수년간 하기도 했다.

서씨의 경우 젊은 시절 노후 준비를 잘 해둬 생계에 지장이 없지만 다른 몇몇 실버택배원들은 한 달 60만원의 급여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빵이나 김밥 한 줄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처럼 운동삼아서 이 일을 하는 노인들도 있지만 몇몇은 이 일로 생계를 잇고 있지…. 서울 밥값이 좀 비싸야지, 혼자 사는 노인네들한테는 1000원, 2000원도 큰 돈이야. 특히 식사시간 때 택배를 해야되면 끼니를 거르거나 이동하면서 대충 때울 때가 많지.”

서씨가 매일같이 수십개의 지하철역을 이동하며 이 일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다.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가족이지만 서씨는 늘 가족을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있는 어린 손주의 사진을 보며 힘을 낸다고 했다.

“죽으면 돈이 다 무슨 소용이야? 가끔이라도 찾아오는 손주들 손에 용돈이라도 쥐어주기 위해 일을 쉬지 않는 거라고….”

낮 12시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10여분을 걸어가 고객에게 물품을 전달한 서씨는 다시 사무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수차례 젊은 세대들에게 강조했던 말을 재차 내뱉는다.

“기자 양반, 삶은 절대적으로 아픈 것이야… 세상에 할 일은 많아, 움직이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발견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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