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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소련군,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조작한 이유 3가지

[WHY]소련군,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조작한 이유 3가지

기사승인 2015. 04. 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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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이익 충실 대변 △권력 장악할 정도 정치적 야심, 잔혹성 △고향 평남 대동군에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소문
45년_10월_14일_평양공설운동장_김일성_장군_환영대회장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 이 대회에서 김성주는 소련군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날조되어 처음 등장한다.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 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8편

1945년 당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어떻게 박헌영, 조만식 등 당시 북조선에서 쟁쟁한 인물을 제치고 스탈린의 낙점을 받고 1인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 6.25전쟁 당시 북한인민군 부총참모장 겸 정찰국장을 지내고 이후 소련 주재 북한 대사를 지낸 이상조씨는 198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서울 연세대학 최평길 교수와의 대담에서 증언했다. 이 자리에는 모스크바공산대학의 한(韓)막스 교수 등이 동석해서 이상조씨의 증언을 도왔다.

이 최교수의 보고서에서 한막스 교수는 “당시 소련 정부는 얄타협정에 따라 북조선에 공산정권을 수립할 경우 정권을 맡길 조선인을 선정하는데 고심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 내부의 조선인 지도자는 거의 대부분 스탈린의 고려인 이주 및 탄압 때 숙청돼 내세울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이 상황에서 극동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 등 소련군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우연히 북한정권 담당자로 부상했다”고 증언했다.

한교수의 증언대로 소련이 북한에 파견한 한인들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하나는, 김일성 주석(본명:김성주金聖柱)처럼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출신이다. 최강건(崔庸健), 김책(金策), 최현(崔賢) 등이 여기에 속한다. 동북항일연군이 붕괴된 후, 소련으로 도피하는데 성공한 자가 300명 정도였다. 그 중에서, 한인은 100명 정도였다. 소련은 그 가운데 대체로 60명에서 70명 정도를 북한으로 데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소련은 그들 가운데 30명 정도에, 장교 계급장을 주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만주 목단강(牧丹江)까지가서, 회령(會寧)방면에서 입국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노송령(老松嶺)터널을 파괴해 길이 막혔기 때문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배편으로 원산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1945년 9월 중순의 일이다.

또 하나의 경우는 소련에서 태어난 2세들이다. 허가이(許가이), 박창옥(朴昌玉), 박의완(朴義脘), 기석복(奇石福), 남일(南日)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소련에서 학교교육을 받고 소련공산당원으로서 성장했다. 소련은 그들의 구체적 명부나 사람 수를 발표한 일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의 제반 사업추진을 위하여 유용한 임무를 성취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서 선발된 것은 확실하다.

로마넨코-김일성
1946년 3월 평양에서 김일성(왼쪽 2번째)가 로마넨코 소장(맨 오른쪽)에게서 정책지시를 받고 있다. 맨 왼쪽은 소련파 대표 許가이, 스티코프가 김일성과 로마넨코 사이에 앉아있다.
소련군의 제반 사업이라는 것은, 우선 군정의 실시였다. 다음은 소련의 위성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이들을 위성정권을 세우기 위해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소련이 북한에 위성국가를 수립할 때는 소련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것이 제일의 원칙이었다. 1945년 해방 당시 소련이 첫째로 신뢰할 세력은 지기들이 보호하면서 키워 온 동북항일연군 출신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누구를 그 대표로 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치자 우선 첫째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을 택해야만 했다.

◇소련의 김일성 위장공작

동북항일연군중 한인으로, 가장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김일성’(김성주金聖柱가 아님)이었다. 그는 보천보 습격사건 때 제6사장(第六師長, 3번째 김일성)으로서 이름이 조선 내부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일본군에 사살 당하자 그 후계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까지 계승했다. 소련의 사관학교 출신인 그는, ‘제1노군 제2방면군장(第一路軍 第二方面軍長) 김일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소련으로 후퇴하고서는,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 책임자까지 되었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45년 8.15 광복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소련군이 평양으로 데리고 온 동북항일연군 출신 중에는 있지 않았다.

제이방면군장, 김일성보다 우수한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뒤에 북한정권의 부주석을 역임한 최강건(崔庸健)은,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第二路軍 參謀長)(4번째 김일성)을 맡았던 인물이다. 또 부수상 겸 산업상을 역임한 김책(金策)은, 제3로군(第三路軍)의 상부기관인 중국 공산당 북만성위 비서(北滿省委 秘書)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일제 강점기의 한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당시 한인들 에게는, 뒤에 북한정권의 인민무력부장을 역임한 최현(최용해의 아버지)이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의 문맹으로, 직위는 단장團長(제1로군 제3방면군 제13단장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長)에 머물렀다.

그런데 당시, 소련군은 아주 편리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만주 중국 공산당 유격대(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이라는 인물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 정확한 정체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소련군은, 누군가를 김일성으로 위장시켜 등장시키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누가 김일성 대역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김성주(金聖柱)가 그 김일성으로 결정되지만, 그것은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40여일 후의 일이었다.

김일성 소련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 (앞줄 오른쪽)
1945년 10월10일부터 13일까지의 사이에, 평양에서는 북조선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리고, 여기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탄생했다. 이것이 그 해의 12월17일에는 북조선공산당이 되었고 다음 해인 46년 8월 28일에는 북조선노동당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조선노동당은 1945년 10월10일을 당창건일로 하고 있다.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이 탄생했을 때, 김성주가 처음으로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책임비서대리 김용범(金鎔範)의 아래인 제1비서직에 취임했다.

그때까지의 40여 일간, 김성주(金聖柱)는 김영환(金英煥)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 김일성으로 둔갑한 김성주(金聖柱)에 대한 환영대회가, 그 해의 10월14일에 열렸던 점을 고려하면,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올 때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내세울 계획은 아직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해서 내세우거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1비서에 앉히거나 하는 모든 공작은, 소련군의 로마넨코 장군과 이다나체프 대좌 등이 중심으로 진행했다. 1945년 당시 북한주둔 소련군은 치스챠코프 대장 지휘 아래 제25군이었으나, 그 사령부는 평안남도 도청에 있었다.

◇로마넨코 정치사령부, 김일성 조작 공작 집행

이와는 달리 평양세무서 자리에 또 하나의 사령부, 즉 로마넨코 정치사령부가 있었다. 이곳에서 소련 위성정권을 세우는 공작이 계획 검열되어 집행되었다.

그러면, 로마넨코 사령부가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조작해 내세우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먼저 첫째로 그는 소련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둘째는 권력을 소화할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김성주의 자질과 능력에 관한 평가는, 단시일 내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당한 기간에 걸친 관찰이 필요했다.

아마 5년 가까이 김성주를 교육훈련시킨 소련 극동군 정치부라든가 내무성 연해지구 경비대로 유익한 증언이 있었을 것이다.

로마넨코는, 연해주 방면군단의 정치장교로 극동생활이 오래였다. 그는 경험이 많은 정치공작가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그나체프도 같은 경력의 정치장교였다. 그들의 상관이 스티코프대장으로, 모든 정치적 문제는 그의 손으로 결정되었다.

스티코프는 평양 주재 초대 소련대사로 근무했다. 이그나체프는 그의 고문으로서 소련군 철수 후에도 계속 평양에 주재하면서, 김성주의 후견인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두 가지 조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해서 내세웠을 경우, 그런대로 통용될 수 있는 무언가의 조건이 필요했다. 그런데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오인된 적이 있어서, 그의 고향인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일대에서는, 김성주가 다름 아닌 김일성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김성주는 1930년 11월경, 삼성학교三成學校 교원인 최형우崔衡宇로부터 일성一星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는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결국, 소련군 당국은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결정했다.

소련군_입성_환호_북한주민(45년_8월_26일)
1945년 8월 26일 소련군의 평양 입성에 환호하는 평양 시민들
◇소련군의 용의주도한 심리작전

그러나 소련당국의 음모는 김성주를 단지 김일성으로 해서 내세우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소련은 그를 김일성장군으로 날조해서 내세웠다. 한인들 사이에 옛날부터 퍼져 있었던 ‘전설의 김일성장군’에 대한 존경까지 얻기 위해 교묘하고도 용의주도한 심리작전을 편 것이다.

이 같은 음모는 모스코바의 승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스티코프의 건의는 제1부수상 겸 내무상이었던 베리아에게로 들어갔을 것이다. 베리아는 당시 스티코프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모스크바가 김성주를 김일성장군으로 둔갑시키고 북한의 제일인자로 지명했다면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원칙은 음모의 국제화에도 대단히 편리했던 것이다.

소련당국은, 김성주를 김일성장군으로 내세울 때, 특히 주의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김성주를, 소련과는 깊은 관계가 없게끔 위장하는 것이었다. 소련군 당국은 김성주는 소련어를 잘했는데도 일부러 통역을 붙였다. 또 김성주의 경력에서 소련으로 같던 사실을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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