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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의 기다림’…순직 원양어선원 가족품으로 돌아와

‘40년간의 기다림’…순직 원양어선원 가족품으로 돌아와

기사승인 2015. 11. 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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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양어업 간 형님의 유해를 품에 안고<YONHAP NO-2231>
지난 4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동방77호 선원으로 원양어업에 나섰다가 순직해 스페인 라스팔마스 선원묘지에 안장됐던 고(故) 이주호 씨의 유해가 도착해 이씨의 동생 이현호 씨(왼쪽)가 가족과 함께 유골함을 전달받은 뒤 오열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970년대 우리나라 경제역군으로 5대양을 누비다 순직해 이역만리 타국에 묻혔던 원양어선원들의 유골이 40년 만에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다.

4일 인천국제공항으로 순직 원양어선원 유골 4위(位)가 들어왔다. 33년 전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 라스팔마스로 원양어업을 나섰던 고(故) 이주호 씨의 동생 이현호 씨를 비롯한 유가족들 염원이 마침내 이뤄진 것이다.

이날 이 씨는 “형님을 33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됐다”며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잘 알려진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가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수많은 우리 원양어선원들은 목숨을 걸고 머나먼 바다로 나가 우리나라 근대화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원양어선원들은 이역만리 바다로 나가 고기잡은 돈을 한국에 보냈다. 정부는 당시 원양선원이 외화벌이로 국가경제에 기여한 바를 인정해 순직 처리했다.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1958년 제1지남호가 인도양으로 참치 조업을 나간 것이 시초다. 그 뒤로 1960~70년대 오대양을 누비며 파독광부 못지않은 외화벌이를 했다.

특히 이름도 생소한 스페인 항구도시 라스팔마스는 우리나라 대서양 원양어업의 전진기지로 1970년대에는 한인 1만5000명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곳이기도 하다.

이충구 라스팔마스 한인회장은 “1966년이후 1970~80년대 5대양 6대주 우리 원양어선이 안 가있는 곳이 없었다”며 “사실 1958년에 원양어업 사업일꾼들이 파독 광부보다 먼저 해외로 나가는 등 조국 근대화 발전에 앞장을 섰는데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그는 “초창기 제대로 된 원양어업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아 많은 선원이 대서양 해역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덧붙였다.

현재 해외에서 관리되고 있는 우리나라 원양어선원 묘지는 스페인 등 7개 나라에 총 327기다. 지난해 최초로 스페인에서 1기가 돌아왔으며, 유가족의 희망에 따라 이번에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4기의 납골묘가 국내로 이장되는 것이다.

최현호 해수부 원양산업과장은 “앞으로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해외 묘지관리와 함께 유가족이 희망할 경우 무상으로 이장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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