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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매국노에서 호법신(護法神)으로

[칼럼] 매국노에서 호법신(護法神)으로

기사승인 2019. 03. 27.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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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황태자 시절이던 1891년 5월, 막강한 러시아 함대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해 고베에서 도쿄로 향하다가 오쓰시(市)를 지날 무렵 경호 경관인 쓰다 산조가 느닷없이 일본도로 황태자를 내리쳤다. 무엄하게도 천황 폐하를 알현하지 않은 채 일본 천지를 휘젓고 다닌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쓰다는 달아나는 황태자를 좇아가며 칼을 휘두르다가 인력거꾼들에게 붙잡혔다. 황태자가 입은 상처는 크지 않았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었지만, 일본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동방 진출을 노리는 강대국 러시아가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을 침략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일왕 메이지는 니콜라이가 치료 중이던 교토로 몸소 찾아가 사죄했고, 일본 전역의 절과 신사에서 황태자의 쾌유를 비는 기도회가 열렸다.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수만명의 학생들에게 황태자의 빠른 회복을 바라는 위문편지를 쓰게 했다. 한 여성은 러시아에 사죄한다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일본 열도가 통째로 공러증(恐露症)에 빠져 러시아 앞에 납작 엎드린 꼴이었다.

쓰다의 재판이 열리자 일본 조야는 한 목소리로 쓰다의 사형을 요구했다. 당시의 일본 형법은 일반인에 대한 살인미수죄는 무기징역을 최고형으로 규정하면서, 예외적으로 천황이나 황족에 대한 위해 행위는 대역죄라 하여 살인미수죄에도 사형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문제는 니콜라이가 일본의 황족이 아니어서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그에 대한 살인미수를 사형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대심원장 고지마 고레가타는 고민에 빠졌다.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근대 형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를 고수할 것인가, 정부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죄형법정주의를 저버릴 것인가? 쓰다를 사형에 처하라고 막무가내로 닦달하는 여론과 정부의 요구는 거의 협박 수준이었다.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도 제 나라가 침략당하는 것은 두려웠던지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쓰다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포퓰리즘의 선동이었다. 뒷날 사라예보 사건에서 실증되었듯 제국의 황태자에 대한 암살 시도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할 구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지마 대심원장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쓰다에게 대역죄가 아닌 일반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무기징역형이 선고되도록 재판을 이끌었다. 말할 것도 없이 고지마를 매국노라고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는 결국 대심원장직에서 사임했는데, 정작 러시아는 일본 법원의 판결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이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13년 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지마는 ‘러시아에 맞서 나라의 주권과 사법의 독립을 지킨 호법신(護法神)’으로 추앙받았고, 고지마가 죽자 메이지 일왕은 그의 무덤을 찾아가 정중히 추모했다. 사건 당시 쓰다를 제압한 인력거꾼들은 애국자로 칭송받았지만 러일전쟁 후에는 ‘적국을 도와준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염량세태(炎凉世態)가 드러낸 포퓰리즘의 민낯이었다.

메이지유신으로 개발 도상에 있던 당시의 일본은 후진적 사법제도 때문에 서구 열강에게 광범위한 치외법권을 허용하는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했는데, 거센 압력 속에서 죄형법정주의를 지켜낸 고지마 대심원장의 결단으로 선진 사법의 토대가 튼실해짐으로써 일본은 비로소 열강과의 불평등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대법원장의 소임 역시 그와 다를 리 없다. 대법원장뿐 아니라 모든 법관이 마찬가지다. 권력의 위협이나 법감정을 앞세운 여론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면 사법부도 법치주의도, 그리고 궁극에는 나라와 국민도 크나큰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권력이나 포퓰리즘은 아침안개처럼 덧없는 것이지만, 사법의 독립은 먹구름 너머의 햇살처럼 찬연(燦然)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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