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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1984년 LA올림픽 복싱 미들급 금메달 신준섭의 라이프 스토리

[조영섭의 복싱비화]1984년 LA올림픽 복싱 미들급 금메달 신준섭의 라이프 스토리

기사승인 2019. 04. 0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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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신준섭
우리나라 복싱종목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신준섭 /조영섭 관장
지난달 26일 서울시립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제30회 대한 복싱협회장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서울에 입성한 신준섭 남원시청 감독(57), 1984년 LA올림픽 레스링 자유형 68kg 금메달리스트 유인탁(62)과 23년만에 회포를 풀었다. 미국으로 떠났던 신준섭의 국내 복싱계 컴백을 축하하기 위해 선배 체육인 유인탁이 마련한 자리였다. 이 두 사람은 1984년 LA올림픽에서 8월 12일 같은날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특별한 인연이 있다. 올림픽 출전 당시 유인탁은 손갑도, 방대두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한 레슬러였고 신준섭 역시 김광선, 허영모, 문성길, 김동길 등에 밀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국의 스포츠전문지 일러스트 레이티드와 한국대표팀의 미국인 코치 로버트 R. 도시는 올림픽에 출전하기전 신준섭의 금메달이 가장 유력하다고 예상했었다. 유인탁은 1998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감독과 전주대 교수를 거쳐 전북체육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다 작년에 퇴임을 했다.
사본 -LA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유인탁과 신준섭(우측)
LA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유인탁과 신준섭 /조영섭 관장
그는 한국복싱의 역사를 새로이 쓴 신준섭은 우리나라 복싱종목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최고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최초는 영원하다. 그러기에 역사는 최초의 기록을 금과옥조(金科玉條) 처럼 소중히 다룬다. 신준섭은 우리나라 복싱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보급 복서다. 그는 강단 있고 솔직 담백하다. 왕조시대로 말하면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읊조리는 순종형이기보다는 ‘전하 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하고 직언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지도자다.

필자가 신준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38년전인 1981년 12월 이리체육관 복싱 동계훈련장에서 였다. 당시 그는 제62회 전국체전 미들급 결승에서 서울체고 이해정(56)에 패하고 원광대 입학을 앞두고 있던 복서였다. 당시 그는 체육관 앞에서 동생과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체전이 끝난 후 고향 남원에서 추계 축구경기를 하다 골절상을 입고 치료 중 이었다. 어느 날 필자는 그의 자취방을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부상 중에도 그는 큰 호박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편히 쉴 수 있는 핑계를 찾는 대신 훈련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1983년 필자는 전국체전과 대통령배 로마월드컵 대표선발전에 전북대표로 그와 같이 출전하면서 좋은 인연을 맺었다. 좋은 인연이란 함께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좋은 기억들이 먼저 떠오르고 어디서 무얼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지며 항상 보고싶다는 여운이 남는 인연을 말한다.
사본 -문성길 박형춘 선생 신준섭(우측)
문성길 챔프, 박형춘 선생, 신준섭 /조영섭 관장
다음 날 경기장에는 그를 지도했던 박형춘 선생을 비롯해서 문성길, 이해정, 곽귀근 등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쳐 옛 추억을 떠올리며 기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박형춘 선생은 이들이 현역 시절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서 신준섭에 비슷한 수준 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멘탈 면에서는 신준섭을 따라갈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신인시절 숱한 패배가 자양분이 되어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가 특히 강했다. 문성길도 신준섭에 비해 멘탈이 2% 부족했다. LA 올림픽 16강전에서 문성길은 강력한 우승후보 미국의 로버트 샤논에게 3회 RSC승을 거뒀다. 이에 언론에서 올림픽 금메달은 공식이라고 대서특필된 문성길은 경기가 없던 다음 날 훈련에 동행하지 않고 여유 있게 숙소에서 낮잠을 질펀하게 자고 만다, 결국 그 영향으로 그날 밤 잠을 못자고 링에 올랐고 첫 회에 스탠딩 다운을 당했고, 이후 버팅에 의한 눈부상으로 RSC로 패했다. 큰 경기에선 아주 작은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올림픽 정상은 신의 허락 없이는 등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제우스 신을 노하지 않게 경건한 자세로 임해야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는 대회가 바로 올림픽 대회가 아닐까 싶다.

1982년·1986년 아시안게임 LM급 2연패의 금자탑을 달성한 중량급의 간판스타 이해정도 멘탈에서는 신준섭에 밀렸다. 당시 대표팀 코치인 박태식(67)은 선수들에게 ‘한국인 체형상 W급 이상에서는 메이저 대회에서 입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자 이해정은 그 말이 고스란히 몸에 스며들어 결국 1983년 로마월드컵과 1984년 LA올림픽에 승선하지 못하고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신준섭은 달랐다. 분기탱천하며 훈련에 더욱 더 매진해 결국 동양인으로 정복하기 힘든 올림픽 미들급에서 정상에 올랐다. LW급의 박태식은 현역 시절 2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한 베테랑 복서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박태식을 현역시절 침몰시킨 복서는 마산공고 3학년 조용래였다. 1976년 12월 맞대결에서 조용래의 카운터 펀치에 한차례 녹다운을 당하고 완패를 당했다. 천하의 박태식도 하늘 높은 줄만 알았지 땅 넓은 줄 몰랐던 모양이다.
사본 -한국 아마복싱 중량급의 양대산맥 신준섭(좌측)과 이해정
한국 아마복싱 중량급의 양대산맥 신준섭과 이해정 /조영섭 관장
한편 이해정은 1986년 리노 세계선수권에 대표로 발탁, 워밍업을 마친 후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링을 떠났다. 좋은 선수와 최고의 선수의 차이점은 중압감이 극에 달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결단과 집중력 그리고 정신적인 강인함에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스타와 슈퍼스타의 차이점이다.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김정행 전용인대 총장의 인상적인 멘트가 생각난다. “각 종목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은 그 종목을 대표하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이 되고, 희망이 되고, 길잡이가 되기에 각 단체장들은 그들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로 부각시켜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복싱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가득하며 역경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어떤 복서가 될지 결정된다. 반복되는 패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한 절대 패배자가 아니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연맹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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