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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儒商] ‘호암신화’의 뿌리는 기호남인의 실학

[한국의 儒商] ‘호암신화’의 뿌리는 기호남인의 실학

기사승인 2016. 03. 0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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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퇴계 이황 '선비정신' 바탕으로
祖父스승 허전의 실학이념 계승
'실사구시·경세치용' 현실 적용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전경.  

                 /제공=의령군 

이병철 회장<사진>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부친 이찬우와 모친 안동권씨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 해는 바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해였다. 그의 16대조는 500여 년 전 연산군 때 사화(士禍)를 피해 중교리를 은거처로 삼아 낙향하였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16대조 후에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분이 간혹 있었으나, 10대조 이후부터는 정치와는 무관한 채 포의의 선비로서 살아 온 것 같다"고 하였다.


 그의 자서전에서 "조부 문산 이홍석(李洪錫)은 학문에 소양이 있어 당시 영남의 거유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생으로서 시문·성리학 등에 능했으며, 퇴계 이황(李滉)의 존덕재를 건립하고 미수 허목(許穆)의 《경례유찬》과 자신의 《문산문집》을 간행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조부 이홍석이 허전의 제자임을 밝히고, 이황과 허목이 관련이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홍석의 학풍을 알기 위해서는 이황, 허목과 허전이 어떠한 사이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 선비들은 퇴계 이황의 학풍을 이어 받은 남인과 율곡 이이의 학풍을 이어 받은 노론으로 나누어진다. 인조반정(1623)이후 정국은 노론이 주도했고, 남인은 요직에 거의 등용되지 못한 채 중앙정치 무대에서 멀어졌다. 이 때문에 남인학자들은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황의 수제자로 조목, 유성룡, 김성일, 정구가 있다. 조목, 김성일, 유성룡과 같은 제자들은 안동지역에서 이황의 학풍을 계승하는 전통적인 주자학을 연구하였고, 정구의 문하생인 허목, 그 제자인 성호 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기호지역의 남인은 이황의 학풍을 존중하면서도 정치적 현실문제와 새로운 지식의 이해에 관심이 깊었다. 조선후기에 서학(西學)이 들어왔을 때, 가장 진지한 관심과 적극적 수용태세를 보인 유교 지식층은 바로 기호남인이었다. 그들은 앞서 서학을 배우기 시작하고 실학의 업적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실학파 중 기호남인 출신이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홍석의 스승인 허전은 경기포천 출신으로 이익의 실학사상을 안정복, 황덕길로부터 이어 받았다. 허전은 고종1년 김해부사로 부임해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는 한편, 김해를 비롯한 창원, 의령 등 인근 지방의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익의 실학사상을 경남지역 유학자들에게 전파시켰다. 이 때 이홍석도 허전과 사제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 27세일 때다. 허전의 문도는 500여명으로 거의 대부분이 경남지방의 선비들이다. LG 구인회 회장의 조부 구연호도 허전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허전은 이익과 안정복을 이은 기호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宗匠)이었다. 100여 년 전 경남 산청의 선비 집에 사마천이 쓴 성공한 상인의 기록인『사기』「화식열전」의 필사본이 있었는데 이로 보아 당시 그 지역에서 실학사상이 꽤 유행했던 것 같다. 허전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허전은 이홍석이 말년에 세운 서당 문산정의 기문(記文)에 '이공(조부)은 실사구시의 학풍을 좇았다'라고 썼다. 이병철 회장은 "조부대에 가산이 천여석이 된 것도 이용후생에도 능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이로 보면 이홍석은 실사구시·경세치용의 실학사상을 현실에 적용한 선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선친은 단정하고도 근엄한 분이었지만 자녀들에겐 언제나 인자하여 큰소리로 꾸중 한번 하는 일이 없었다. 공맹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켰고, 퇴계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했다. 그는 기호남인의 학풍을 잇는 집안에서 유교의 선비정신과 평소 조부와 부친의 실학사상의 바탕위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장차 그의 인생행로를 결정짓는 길잡이이자 동시에 튼튼한 초석이 되었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성장한 인근 지역은 LG 구인회 회장, 효성 조홍제 회장을 비롯한 기업가를 많이 배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통주자학을 연구했던 안동지역의 영남남인 후손 중에는 학자들이 많다. 성호 이익으로부터 이어지는 기호남인의 실학사상이 허전을 통하여 경남지역에서 꽃을 피웠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글=이제홍 태성회계법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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