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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최고(最古)의 파피루스 문서, 불멸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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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4. 20. 17:33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35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 인류사 최고(最古)의 붓글씨

파피루스는 아프리카의 호숫가나 늪지대에 갈대처럼 무성하게 자라나는 물풀(水草)이다. 고대 이집트 벽화에는 먼 옛날 나일강 삼각주에서 푸르게 자라나는 파피루스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파피루스를 엮어서 바구니, 샌들, 이불을 짰고, 약재나 향료로 쓰거나 작은 배를 만들기도 했다. 역사학에서 이 물풀이 특히 중시되는 이유는 종이처럼 문자를 기록하는 용도로 널리 사용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는 70만 장이 넘는다. 온전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경우는 드물지만,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놀랍다. 사막 특유의 건조한 기후, 수액의 자체 방충 효과, 고품질의 잉크 덕분에 다량의 파피루스 문서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비록 부서진 조각들로 전할 뿐이지만, 인간이 붓을 들고 직접 손으로 쓴 생생한 기록이다.


현전 최고(最古)의 파피루스 문서는 2013년 기자에서 동남쪽으로 140㎞ 정도 떨어진 홍해 연안의 와디 엘-자르프(Wadi el-Jarf)에서 발견되었다. 그 내용을 분석한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 문서는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제작되던 쿠푸 통치 연간(기원전 2589-2566)에 제작되었다. 진흙판에 새겨진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문서를 제외하면 지구인의 세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수기(手記) 문서(manuscript)다. 고대 중국 상(商) 문명 은허(殷墟)의 갑골문(甲骨文)보다 무려 천년이나 앞선다.

무엇보다 인간이 붓을 들고 종이 위에 직접 쓴 문서라는 점에서 세계사 탐구에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종이에 붓으로 쓴 글씨에는 글을 쓴 사람의 몸동작뿐만 아니라 심장 박동과 손의 떨림까지도 미세하게 담기게 마련이다. 그 문자를 뚫어지게 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4600년 전 글씨를 직접 쓴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파피루스 문서의 최초 복구 과정
와디 엘-자르프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의 최초 복구 과정. Mark Lehner and Pierrer Tallet, The Red Sea Scrolls (Thames and Hudson, 2022)


◇ 4600년 전의 감독관 메르에르의 일지

와디 엘-자르프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는 160명이 배속된 공동 작업팀의 문서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문서는 쿠푸 왕의 통치 막바지였던 기원전 2564년에서 2565년 사이 1년 약간 넘는 기간에 작성되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완성되기 얼마 전이었다. 이 기록을 남긴 인물은 메르에르(Merer)라는 이름의 관리였다. 그는 피라미드 제조에 직접 참여했던 160명 규모 작업팀을 통솔하는 감독관(監督官, inspector)이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공사 현황을 기록한 일지(日誌, diary)였다. 그의 글씨는 고대 이집트의 성직 계층이 개발해서 널리 사용했던 신관(神官) 문자(hieratic script)로 이뤄졌다. 신관 문자란 흘림체를 이르는데, 상형문자가 점점 발전하여 뜻글자와 소리글자를 합쳐진 효율적 표기 방법이었다.

40명씩 4단위(phyle)로 작업팀의 주된 업무는 나일강 동쪽에 놓인 투라(Tura)의 채석장에서 석회석을 채굴하여 피라미드를 짓고 있는 기자까지 실어 나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열흘마다 왕복 3차례씩 배를 타고 나일강의 물길을 따라서 석회석을 실어 날랐다. 석회석은 층층이 쌓아 올린 피라미드의 바깥면을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매끈하게 덮어씌우는 석재였다. 메르에르의 일지에는 분명하게 날짜가 적혀 있으며, 방문한 장소가 명기돼 있고, 선원의 구체적인 업무, 운반 업무 및 소요 시간 등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쿠푸 왕의 이복동생 안크하프(Ankhhaf)와 같은 고위 관료의 성명도 등장한다. 중급 관리가 일상적으로 이처럼 상세한 일지를 적었다는 사실은 문자 생활이 일반화된 고대 이집트의 높은 문화 수준을 보여주며, 아울러 국가 행정이 지방의 말단 공사장에서도 엄격하게 실행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피라미드에서 멀지 않은 채석장 활동이 주로 기록된 메르에르의 일지가 기자에서 140㎞나 동남쪽으로 떨어진 와디 엘-자르프에서 발견된 까닭은 무엇인가? 학자들은 메르에르의 작업팀이 맡은 또 하나의 중대 임무는 바로 홍해에서 배를 타고 이집트 동부의 시나이반도의 동광(銅鑛)에서 동(銅)을 캐오는 것이었다고 추정한다. 와디 엘-자르프에는 바닷길로 나아가는 항구가 구축돼 있었다. 선박용 목재는 이집트인들은 레반트 지방의 침엽수를 사용했다. 값비싼 목재였기에 항해를 마친 후 그들은 선박을 분해해서 항구 주변의 비밀 창고에 은닉한 후, 커다란 석재로 입구를 막았다. 메르에르의 일지는 바로 그 비밀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와디 엘-자르프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
와디 엘-자르프 발굴 현장에서 발견될 당시의 파피루스 문서 (대략 4,600년 경).
◇ 불멸을 꿈꾸며 시간에 저항하는 인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매 순간 새로 일어나는 찰나의 현실은 쏜살같이 과거로 사라진다.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물이 돌이나 나무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오직 인간만은 불멸을 꿈꾸며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려 발버둥 친다. 물론 인간은 스스로 불멸을 이룰 수 없고,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멸에의 집념을 버리지 못하기에 호모사피엔스는 다양한 방법으로 불멸을 추구한다. 절대자를 향한 믿음으로 영생을 구하는 방법도 있고, 고행을 통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시도도 있다. 이 두 방법은 허망하게 소멸하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무의미의 나락에서 구출하려는 적극적 몸부림이다.

이와 달리 영생이나 열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보다 소극적인 방법으로 불멸을 얻으려 한다. 실로 많은 인간은 손님처럼 잠시 머무른 이 세상에 어떻게든 살다 간 흔적이라도 남기려 발버둥 친다. 사후 불멸하는 영혼 따위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선 소극적이라 할 뿐, 현실에선 훨씬 더 강렬한 열망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살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거나 대규모 사업을 일으키면 위인의 반열에 올라서 자자손손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4600년 전 지어진 기자의 대피라미드야말로 불멸을 얻으려는 지구인의 집념을 보여준다. 진정 왜 파라오들은 피라미드 건설에 왜 그토록 많은 재원과 인력을 투입했을까?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후(死後, duat)에도 계속 삶이 이어진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파라오는 이집트의 수호신 호러스(Horus)의 현현(顯現)이라 여겨졌기에 신적 존재로서의 영생을 누리기 위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피라미드에 고대인의 종교관이 반영됐다는 점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과연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라고 해서 신화를 확신할 수 있었을까? 호모사피엔스란 본래 의심이 많고 거짓말을 잘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런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메르에르의 일지를 살펴보던 외계인 미도가 물었다.

"4600년 전의 한 지구인의 글씨를 이렇게 마주 대하니 피라미드를 직접 볼 때보다 더 큰 충격파가 밀려옵니다. 메르에르의 일지 역시도 불멸에 도전하는 지구인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까요?"

미도의 통찰대로 메르에르의 일지에는 피라미드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불멸에의 염원이 담겨 있는 듯하다. 어떤 형태이든 기록이란 삼라만상을 삼켜서 무의미의 나락 아래로 뱉어버리는 잔인한 시간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기에 더더욱.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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