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히로시마 서포터즈 | 0 | 보라색 물결로 가득 찬 관중석. 이날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홈경기는 전석 매진됐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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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히로시마, 일본) = 지난 29일 일본 히로시마의 에디온 피스 윙 스타디움. 황금연휴 기간 중 치러진 J1리그 제13라운드,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알비렉스 니가타의 경기는 경기장 안팎을 가리지 않고 J리그라는 리그가 가진 저력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90분 이상의 시간, 그 안에는 축구가 문화로, 일상으로 자리 잡은 한 지역 공동체의 풍경이 녹아 있었다.
히로시마를 연고로 하는 산프레체는 일본 축구를 대표하는 전통 강호다. J리그 원년 멤버로서 수차례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기술과 조직력을 균형 있게 갖춘 팀 컬러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그들과 맞선 알비렉스 니가타는 규모로는 히로시마에 미치지 못하지만, J리그 내에서도 손꼽히는 열성적인 팬층과 지역 밀착형 운영 모델을 자랑한다. 인구가 적은 지역임에도 매 시즌 높은 평균 관중 수를 기록하는 니가타는 '작은 대도시 클럽'이라는 별칭처럼 지역 공동체의 자부심을 등에 업고 있는 팀이다.
 | 솔드아웃 | 0 |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알비렉스 니가타의 경기 매진을 알리는 안내 문구가 전광판에 표시되고 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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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경기는 니가타가 원정에서 값진 승리를 가져갔다. 후반 40분, 교체 투입된 미겔 실베이라가 하세가와의 패스를 받아 골망을 흔들었다. VAR 판독 끝에 득점이 인정됐고, 니가타는 이 한 골을 끝까지 지켜내며 1-0 승리를 기록했다. 히로시마는 점유율과 슈팅 수 모두 우세했지만, 상대의 견고한 수비를 뚫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특히 전반전에 여러 차례 찾아온 결정적 찬스를 살리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경기 내용 자체만 보면 히로시마가 주도한 경기였다. 60%를 웃도는 점유율, 15개 이상의 슈팅 시도는 숫자상으로 분명한 우위였지만, 축구가 '결정력'의 스포츠임을 새삼 상기시키는 결과가 됐다. 니가타는 선수비 후역습 전략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히로시마의 공격을 저지했고, 실베이라를 통한 찬스를 완벽하게 골로 연결하며 원정 승리를 일궈냈다. 전술적 완성도 측면에서도 니가타는 "어떻게 이길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준비해온 팀이었다.
 | 경기 전 모습 | 0 | 경기 전부터 스타디움 주변은 이미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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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기장의 진정한 매력은 그라운드 위에만 있지 않았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스타디움 주변은 이미 축제 분위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 유니폼에 서포터스 스카프를 두른 노부부, 삼삼오오 몰려든 청년들까지 다양한 세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은, J리그가 단순한 프로스포츠를 넘어 생활의 일부가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히 경기를 소비하는 관객이 아니라, 클럽의 일부로서 경기를 '만들어내는' 주체였다.
니가타의 원정 팬들 역시 감탄을 자아냈다. 수백 킬로미터-8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온 서포터들은 거대한 깃발을 흔들며 경기 내내 목청을 높였고, 골이 터진 순간에는 마치 홈경기처럼 경기장을 뒤덮는 환호를 터뜨렸다. 그들의 열정은 지역 밀착형 클럽이 갖는 무게와 의미를 새삼 느끼게 했다.
 | 유모차 보관 구역 | 0 | 가족 단위 관람객을 위한 유모차 보관 구역이 경기장 곳곳에 마련돼 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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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리그를 한국에서 바라볼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은 '팬 문화'와 '운영 시스템'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접한 J리그는 단순한 표면적 평가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스타디움 곳곳에는 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전용 좌석과 진입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어린이 팬들을 위한 체험 부스, 고령자 관객을 위한 이동 편의시설도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축구를 즐기기 위한 물리적·심리적 장벽을 낮추려는 노력은 일본 축구계가 오랜 시간 쌓아온 성숙함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현장은 K리그가 앞으로 참고해야 할 방향성을 분명히 제시해준다. 단기간의 성적에 일희일비하기보다, 팬과 지역 사회가 함께 숨 쉬는 구조를 구축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리그를 만들기 위한 근본이라는 것을 히로시마의 90분은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화려한 스타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지역을 사랑하는 수만 명의 팬이 클럽을 진정한 '명문'으로 만든다.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보라색 물결 속에서, 축구의 본질은 다시 한 번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