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 | 0 | 요괴 이바라기도지와 슈텐도지의 등장을 표현한 무대 장면. 세 명의 요괴가 함께 등장해 강렬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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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지난 4월 30일, 히로시마현민문화센터의 대공연장은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이날 무대에 오른 것은 북히로시마 지역의 대표 카구라단인 아자카 카구라(阿坂神樂)단. 그들이 선보인 공연은 일본 설화 중 하나인 『라쇼몽(羅生門)』을 바탕으로 한 전통 카구라극이었다. 헤이안 중기, 무장 '와타나베 츠나'가 요괴 '이바라기도지'의 팔을 자른 사건을 기점으로, 요괴의 복수와 무사의 저항, 그리고 신의 개입이라는 신화적 요소들이 한 편의 연극처럼 무대 위에 펼쳐졌다.
이 공연은 단순한 민속 공연이 아니라, 일본 전통문화의 뿌리를 고스란히 간직한 생생한 '제의(祭儀)적 예술'의 현장이었다. 일본에서 '카구라'란 단어는 원래 '신(神)을 즐겁게 하는 음악과 춤'을 뜻하며, 자연의 순환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사 제례(神社 祭禮)에서 유래되었다. 카구라는 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의례 중 하나였으며, 공동체의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는 기능도 담당했다. 이러한 제의는 점차 지역적 특색과 결합되며 무용과 연극, 음악이 결합된 독특한 공연 형식으로 발전했고, 특히 히로시마에서는 '게이호쿠 카구라(芸北神樂)'로 대표되는 화려하고 극적인 스타일이 형성되었다.
 | 1 | 0 | 화려한 의상을 입고 칼을 든 와타나베 츠나 역 배우의 모습. 요괴 이바라기도지의 팔을 자른 직후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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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 0 | 요괴 슈텐도지의 위압적인 모습. 날카로운 시선과 섬세한 분장, 전통 복식이 어우러져 신화 속 존재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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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카구라는 현재 약 150여 개의 단체가 활동 중일 정도로 지역 내 뿌리가 깊다. 이들은 대부분 주중에는 농업, 회사 일 등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주 2~3회씩 연습을 이어가며, 주말에는 각지의 신사, 지역 행사, 대회 등에 출연한다. 공연의 수준은 프로 못지않지만 대부분이 비영리 봉사 형태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카구라는 지역 공동체의 문화적 자산이자 헌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아자카 카구라단의 '라쇼몽'은 특히 그 상징성과 극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츠나의 저택 근처 라쇼몽 문 앞에서 벌어진 일주일간의 대치와 요괴의 변신, 복수, 그리고 신의 개입이라는 전개는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배우들은 무거운 의상을 입고도 재빠르게 무대를 움직이며 검술과 마법의 대결을 펼쳤고, 다이코(북)와 후에(피리)로 이루어진 전통 반주는 음표 없이 오로지 귀로만 전해져 온 리듬으로 장면마다의 감정을 이끌어냈다.
 | 2 | 0 | 히로시마 카구라의 전통 반주를 맡은 악사들. 큰북(오오다이코), 작은북(코다이코), 손 짝짝이(테뵤우시), 카구라 피리(카구라부에)로 이루어진 생음악이 공연의 긴장감과 리듬을 이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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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구라 음악은 공연의 생명이라 불린다. 큰북(大太鼓, 오오다이코)과 작은북(小太鼓, 코다이코), 카구라 피리(神樂笛, 카구라부에), 손 짝짝이(手拍子, 테뵤우시) 등 네 가지 전통 악기는 연주자 개개인의 기억에 의해 구전되어 왔으며, 악보 없이 귀로 익히고 세대 간에 직접 전해진다. 음악은 대사 없이도 전투의 긴박함, 요괴의 위협, 신의 등장 같은 극적 전환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며, 공연 전체를 하나의 '소리의 의례'로 만들어낸다.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것은 공연이 끝난 뒤 마련된 '체험 세션'이었다. 무대 아래 공간에서는 출연 배우들이 직접 나와 관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고,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그들과의 만남을 기다렸다. 배우들은 화려한 복장을 입은 채 친절하게 포즈를 취해주었고, 사진 촬영을 통해 무대 위의 전설이 잠시 현실로 이어지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관객 중에는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공연 내내 영어 자막이 별도로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제공되었기 때문에 극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언어와 문화를 넘어서는 상징성과 몸짓, 음악이 이 공연의 몰입도를 더욱 끌어올렸고, 체험 세션을 통해 그 감동은 무대 밖까지 확장되었다.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새로운 관객과 호흡하며 생동하는 순간이었다.
공연 중간, 해설 내레이션이나 별도의 설명 없이도 이야기의 전개는 놀랄 만큼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이는 배우들의 신체 연기와 상징적 소도구, 그리고 음악이 절묘하게 맞물려 만들어내는 통합적 전달 방식 덕분이었다. 관객들은 요괴의 등장에 숨을 죽이고, 마법의 폭발에 탄성을 터뜨리며, 최후의 신의 등장에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카구라는 단순한 시청각 공연을 넘어서 '공동체적 감정'이 생성되는 장으로 기능한다.
 | 6 | 0 | 공연 종료 후 출연 배우들과 기념촬영한 필자. 전통 공연의 감동은 이렇게 관객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어진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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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시에서는 이러한 카구라 공연을 관광 자원으로도 육성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 히로시마현민문화센터에서는 정기적으로 카구라 공연이 열리고 있으며, 입장료는 약 1,000~1,800엔 사이로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이 정기공연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꾸준한 호응을 얻고 있으며, 히로시마시 문화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특히 공연 중 사진과 영상 촬영이 자유롭게 허용된다는 점은 일반적인 공연에서는 보기 드문 특징이다. 이는 관객들이 무대의 감동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카구라의 매력을 알리고 공유해주기를 바라는 주최 측의 의도가 담겨 있다. 전통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열린 방식으로 전파하려는 이 같은 태도는 오늘날 전통 공연이 대중과 소통하는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카구라의 전통은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예술이다.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관객에게 감동과 놀라움을 선사하며 현재형 문화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전통 예술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날의 라쇼몽 공연은 신화와 설화가 어떻게 현재와 호흡하며, 지역사회와 세계인을 잇는 다리가 되는지를 극적으로 증명한 자리였다.
히로시마의 밤, 요괴가 다시 나타났고, 무사가 칼을 빼들었으며, 신이 개입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