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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선교사 이의순 사모, 가나안농군학교 설립 헌신‧세계열방 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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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기자

승인 : 2025. 05. 11. 03:00

“예수님만 사랑한 삶…천국입성 감사예배 드려”
서대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공동회장이며 홀리씨즈교회 담임목사가 지난 8일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에 헌신하고 세계열방을 품은 기도선교사 이의순 사모의 천국 입성 감사예배를 인도했다. / 사진=홀리씨즈교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장 7~8절)

서대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공동회장이며 홀리씨즈교회 담임목사의 모친 기도선교사 이의순 여사의 천국 입성 감사예배가 지난 8일 은혜 가운데 드려졌다.

기도와 눈물로 민족과 열방을 품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한 여인의 거룩한 생애가 하늘의 부르심으로 완성됐다. 

한평생 복음 전파에 헌신해온 이의순 여사는, 남편인 고(故) 서효근 목사의 동역자로서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을 함께하며 농촌 복음화에 기도와 헌신으로 일관한 선교사였다. 

서효근 목사는 1950년대 함태영 대한민국 부통령의 비서로 국정에 참여했으며, 새문안교회 전도사로 주일마다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는 그 시절 김용기 장로와 뜻을 같이해 “농촌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는 신념 아래, 6·25 전쟁 후 폐허가 된 농촌을 되살리는 계몽운동에 나섰다. 이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을 주도하며 한국 농촌 부흥과 국가 발전의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지난 2018년 3월 21일 CTS기독교TV '내가 매일 기쁘게'에 출연했던 서대천 목사는 “제가 목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어린 영혼들을 보듬는 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시며 헌신하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도와 가르침 때문”이라며 “저의 아버지 서효근 목사는 김용기 장로님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그후 어머니 이의순 선교사는 아버지 서효근 목사와 함께 고통과 고난으로 방향을 잃은 어려운 농촌에서 교회를 개척하시며 농촌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교회가 부흥이 되면 다시 다른 농촌으로 이동해 개척하는 등 가난하고 힘든 농촌의 7개 교회를 개척하시고 주님이 맡겨주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고 전했다. 대한민국의 농업과 새마을정신의 모태가 되었고 국민정신교육의 밑거름이 된 가나안농군학교의 전경 / 사진=CTS기독교TV '내가 매일 기쁘게' 캡처
◇ “예수님만을 사랑한 어머니”…서대천 목사의 신앙고백

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서대천 목사는 ‘오직 예수, 어머니의 길’이라는 제목의 조서를 통해 이렇게 회고했다.

“예수님만을 사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평생 십자가 아래 엎드려 눈물로 세상을 변화시킨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저희 어머니입니다.”

이의순 여사의 생애는 고난 속에서 피어난 믿음의 꽃이었다. 어린 시절, 신의주에서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피난길에 올라 가족과 생이별했던 그는, 평생을 ‘그리움’과 ‘기도’로 살아갔다. 

“주여, 다시 만나게 하소서”라는 눈물의 기도는 끝내 이 땅에서 응답되지 않았지만, 자녀들은 고백한다. “그 기다림은 천국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 농촌계몽운동과 세계열방을 향한 헌신의 발걸음

남편과 함께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고, 도시가 아닌 농촌 오지로 향해 일곱 교회를 섬긴 그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삶을 살았다. 그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온 고백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라는 말씀이었다.

자정이면 산에 올라 비와 눈을 맞으며 무릎 꿇고 대한민국의 복음화와 전 세계열방 200개 나라를 품으며 통곡으로 기도했다. 그 기도는 영혼을 울릴 만큼 뜨거웠고, 하늘을 향한 절절한 믿음의 외침이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그 울부짖음은 하늘을 움직이는 믿음의 통로였다.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에 헌신하고 세계열방을 품었던 기도선교사 이의순 여사의 ‘이의순 사모, 자녀 봉양 마다하고 27년간 환자 무료간행’ 기사가 국민일보(2007년 4월 10일)에 게재된 바 있다.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에 헌신하고 세계열방을 품었던 기도선교사 이의순 여사의 ‘이의순 사모, 자녀 봉양 마다하고 27년간 환자 무료간행’ 기사가 국민일보(2007년 4월 10일)에 게재됐다. / 사진=국민일보
◇ 낮은 자리에서 드린 ‘삶의 예배’

그는 가난했지만 나눔을 멈추지 않았다. 성미 한 바가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어주었고, 병든 자 곁에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며 중보했다. 귀신들린 자를 위해 눈물로 무릎 꿇었고,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도 오직 주님만을 드러냈다.

남편이 소천한 이후에는 더 낮은 자리로 자신을 들였다. 치매와 정신질환을 앓는 환우들과 함께 생활하며 가족처럼 돌보았다. 욕설과 폭력 속에서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대소변까지 받아내며 헌신한 그의 섬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린 예배였다.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마저 시골교회에 헌금하며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 나도 거저 드릴 뿐이다”라고 고백했다. 자녀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 결정은 시간이 흐른 뒤, ‘삶의 예배’로 깨달아졌다.

명절에도 “나한테 올 시간 있으면 소외된 사람을 찾아가라”는 말씀으로 가족의 시간을 주님께 드렸던 그는, 자녀가 아닌 주께서 사랑하신 영혼들을 향해 자신을 드린 삶을 살았다.

서대천 목사는 “어머니는 이 땅에서 예수님만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의순 여사의 마지막 숨결은 말 없이도 삶 전체로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고백하고 있었다. 하늘의 문은 조용히 열렸고, 그는 주님의 품 안에 영원히 안식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자녀들은 눈물로 고백한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그 길 끝에서 다시 어머니를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영광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올려드린다.

지난 8일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에 헌신하고 세계열방을 품은 기도선교사 이의순 사모의 천국 입성 감사예배. 장헌일 목사(국회조찬기도회 지도위원·신생명나무교회 왼쪽부터), 서대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겸 홀리씨즈교회 담임목사, 김회재 변호사(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 사진=홀리씨즈교회
◇ 각계 각층의 추모 이어져…다음세대에게 전해진 신앙의 유산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은 “이의순 기도선교사님은 이 시대의 진정한 믿음의 여인이셨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셨다. 그 기도는 민족과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었다. 이제 천국에서 주님의 품에 안식하신 그 삶을 기억한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았지만, 그의 기도와 헌신은 민족과 교회를 위한 거룩한 유산으로 남았다"고 추모했다.

김회재 변호사(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는 “이의순 기도선교사님은 시대의 고통을 기도로 끌어안고,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분이셨다. 그분의 믿음과 헌신은 이 나라의 영적 유산이며, 모든 신앙인의 본보기이다”라고 전했다.

장헌일 목사(국회조찬기도회 지도위원·신생명나무교회)는 “이의순 선교사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눈물로 민족과 열방을 품으셨던 이 시대의 참된 기도선교사였다. 그 삶은 하나의 예배였고, 후대에 길이 남을 복음의 유산이다”고 말했다.

박홍기 목사는 “이의순 사모님은 새마을운동의 근간이 된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뒤 어려운 농촌 현장으로 사역지를 옮겨 교회를 개척하며 농촌계몽운동에도 앞장섰던 서효근 목사님의 동역자로 충성스럽게 섬기셨다”며 “저의 아버지도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새로운 농법을 배우셨고, 그 기술로 수확에 성공해 저는 어려운 시기에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 병든 자와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자신의 삶 전체를 예배로 드린 신앙의 본보기였다"고 전했다.

이목교회 출신의 목회자는 "전북 무주의 이목교회에서 서효근 목사님과 이의순 사모님의 신앙의 가르침을 받고 청년기를 보냈다. 제가 목사가 된 것도 두 분의 신앙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의순 사모님은 새벽마다 전 세계 200여 개 국가를 위해 세계 열방을 품으며 복음을 위해 울부짖으며 기도하셨다. 특히 서대천 목사님은 서효근ㆍ이의순 부모님의 신앙을 본받아 다음세대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은혜롭다”고 추모했다.

손양원 목사와 주기철 목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권혁만 전 KBS 국장은 “이의순 선교사님은 말보다 삶으로 복음을 전하신 분이다. 언론인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렇게 조용히 세상을 변화시킨 분은 드물다. 그 기도의 유산이 이 땅에 오래도록 남기를 기도한다”라고 말했다.

서대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공동회장이며 홀리씨즈교회 담임목사가 지난 8일 서대운 예수마을교회 목사 등 가족들과 함께 기도선교사 이의순 여사의 천국 입성 감사예배를 드렸다. / 사진=홀리씨즈교회
오직 예수, 어머니의 길 – 조서(弔書)   서대천 목사

예수님만을 사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단상에 오르지 않았지만, 평생 십자가 아래 엎드려 눈물로 세상을 변화시키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저희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의 삶은, 신앙의 씨앗이 고난 속에서 자라 순교의 열매로 맺힌 여정이었습니다. 그 길의 시작은 한 번의 이별, 그리고 평생의 그리움이었습니다.

아직 중학생이던 소녀, 어머니는 신의주에서 남한으로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내려오셨습니다.

북녘 땅에 외할머니와 형제, 자매들을 남겨두고 눈물 속에 내디딘 그 발걸음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의 영원한 단절을 품은 결단이었습니다.

남한에서의 삶은 고단했고, 더 깊은 아픔은 그리움이었습니다. “어머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형제들은 살아 있을까…건강은 하실까…”

그 질문들은 날마다 속을 치고 올라왔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세월은 어느덧 80년이 지나 그 마음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밤 기도하셨습니다. “주여, 다시 만나게 하소서…” 

하지만 그 기다림은 남과 북을 가르는 현실 앞에서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눈물의 시간이었고, 기도의 시간이었으며, 믿음의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알게 됩니다. 어머니의 삶은 그 모든 외로움과 단절 속에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낸 순교자의 길이었다는 것을.

그 기다림은 결국 천국에서 이루어졌고, 이 땅의 눈물은 그 나라에서 기쁨으로 바뀌었을 줄 믿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나안농군학교를 함께 세우셨고, 그 후에는 도시의 편안한 자리 대신, 행정구역상 가장 낮은 단위인 ‘군·면·리’ 중 ‘리’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마을들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일곱 교회를 섬기셨고, 논두렁을 걷고 밭두렁을 넘어 농촌 계몽과 복음화를 위해 당신의 전 생애를 기꺼이 드리셨습니다.

이름 없이, 빛 없이, 가난하고 외진 자리였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외에 어떤 생명도 없다.”

자정이면 어머니는 산에 오르셨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단 한 번도 그 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산, 그 위에서 대한민국의 복음화와 열방 200개 나라의 구원을 위해 어머니는 그 모든 나라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가며 무릎 꿇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 새벽, 산 위에서 터져 나오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는 때로는 온 동네를 깨우고 어두운 하늘을 흔들었습니다.

“여호와여! 여호와여!” 그 울부짖음은 사람의 귀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절규였고, 하늘을 향한 믿음의 통곡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에 그 기도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어떻게 저토록 연약한 여인의 몸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날 수 있단 말인가?”

그 기도는 육성이 아니라 하늘을 찢는 영혼의 외침이었고, 그 순간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 같았습니다.

땅은 조용했지만 하늘은 움직였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편 105절)

어린 시절, 저는 그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남자아이였던 저는 배가 고파 속상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 앞에서 툭 내뱉었습니다. “엄마는… 가난뱅이야.”

아버지께서 안 계신 줄 알고 말을 내뱉고 돌아서던 그 순간, 그 자리에 계셨던 아버지의 손이 제 뺨을 내리쳤습니다.

저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날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세상의 금전은 아니었지만, 하늘의 유산, ‘믿음’이라는 것을.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소천하시고 제가 군 제대를 마친 뒤, 두 동생을 돌보며 삶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던 청춘의 문턱에 막 들어선 스물 즈음의 시절, 어머니는 어느 날 저를 조용히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대천아, 나는 너에게 돈 한 푼 물려주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물려주었다. 그분이면, 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란다.”

그 고백은 제 인생 전체의 방향이 되었고, 복음의 길을 걷게 만든 하늘의 음성처럼 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성도들의 눈물을 대신 울며, 주님의 교회를 내 몸처럼 섬기신 분이셨습니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어머니는 거지의 손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손수 담은 성미(쌀) 한 바가지를 내어주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립니다”라고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병든 자를 위해 밤을 지새우셨고, 귀신들린 이를 위해 눈물로 중보하셨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의 순간에도 당신은 한 걸음 물러서며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셨습니다.

그 어떤 일에도 당신의 이름은 결코 앞서지 않았습니다. 병자가 나아도, 영혼이 회복되어도 그분께서 하셨다고, 예수님만 드러내셨습니다.

아버지의 소천 이후, 어머니는 더 낮고 고된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서너 달 환우의 집에 머물며 가족 대신 대소변을 받아내고, 빨래와 식사를 도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회복되도록 쉬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로 정신질환자나 치매 환자들이었습니다.

머리채를 잡히고, 오물 세례를 받아도 한 번도 낯빛을 흐리신 적 없었습니다. 그 모든 수고는 단 한 푼의 대가도 없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의 섬김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조용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시골 농부가
자기 딸 고쳐줘서 고맙다며 소 판 돈을 내 가방에 몰래 넣어주더라고.
그럴 땐 말이야, 떠날 때까지는 그냥 모른 척해야 해. 그러다 버스에 올라 창밖으로 봉투를 던지면 그만이지.

나는 그저 예수님처럼 조용히 섬기고 싶을 뿐이거든.” 그 말씀은 평범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고백이었지만, 우리에겐 가슴을 울리는 복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은 늘 비어 있었지만, 그 섬김에는 하늘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단 한 푼의 사례도 받지 않으셨고, 조심스레 전해진 정성도 감사 인사만 남긴 채 무너져가는 시골 예배당과 작은 농촌 교회에 흔적 없이 흘려보내셨습니다.

심지어 막내 완실이의 대학교 등록금조차 마련할 길 없던 어느 날, 어머니 손에 한 성도가 쥐어준 봉투가 있었습니다.

‘이번만큼은 받으시겠지…’ 우리는 마음속으로 기대했지만, 어머니는 그 봉투를 조용히 어느 시골 교회의 헌금함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 나도 거저 드릴 뿐이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섭섭하고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그 선택이 어머니의 예배였고, 그 순종이 곧 믿음이었으며, 그 헌신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깊이 사랑한 방식이었음을.

병든 자를 고치고, 예수를 믿게 하신 뒤에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또 다른 고통받는 이를 향해 작은 가방 하나 들고 곧장 떠나셨습니다.

어렸을 때 명절이면 색동 옷을 입고 맛있는 잔치를 차리는 집이 부러웠으며 돈 한 푼 없는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그렇게 싫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우리가 커서 명절에 어머니를 멋지게 모시고 싶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한테 올 시간 있으면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라. 나는 괜찮다.”

그 말씀에 우리는 서운했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사랑은, 우리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품으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십자가의 마음이었다는 것.

어머니의 손에는 가진 것이 없어 늘 비어 있었지만, 어머니의 기도에는 하늘의 권세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작은 이 땅에서 예수님만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리고, 자신은 감추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예수의 사람.

그 이름만으로 하늘에 온전히 기억될, 그분이 저희 어머니였습니다.

당신은 단지 목회자의 아내가 아니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모님’ 또는 “기도 선교사”라 불렀지만, 하늘은 당신을 “예수를 사랑한 사람”, “예수를 기다린 사람”, ‘예수를 닮은 사람’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조용한 섬김 속에 믿음의 불꽃을 품고 살아오신 당신은, 주님의 심장으로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이제 어머니는 그토록 사랑하고 그토록 보고 싶어하셨던 예수님을 마침내 만나셨습니다.

마지막 숨결이 사라지던 그 고요한 순간,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당신의 전 생애가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 없는 고백 속에 하늘은 조용히 열렸고, 당신은 주님의 품 안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

어머니, 이제 당신은 영광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 살아가는 저희는 슬픔이 아닌 소망의 눈물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우리는 다짐합니다. 어머니가 남기신 그 믿음 따라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저희도 이 길의 끝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장 7–8절)

사랑하는 어머니, 당신은 가난한 땅 위에 하늘의 나라를 심으셨고, 그 나라의 열매는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수고를 마치시고 주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쉬소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 그 길 끝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 이 모든 영광 홀로 받으시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안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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