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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기자의 대학로 오디세이] 죄의 경계와 기억의 파열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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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5. 15. 09:00

연극 '탓' 리뷰
누구의 기억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공연장면 (3)
연극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 과연 우리는 진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 사진 무죽페스티벌 제공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연극 '탓'은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흔적을 좇으며, '진실'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한밤중,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선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 죽음의 책임을 놓고 충북과 경북 파출소의 반장인 두 형사(각각 '충경'과 '경경')는 관할권을 따지며 실랑이를 벌이고, 목격자로 불려온 창식과 세란은 서로 엇갈린 진술을 내놓는다. 그리고 무대 한가운데 시체로 누워 있던 유용준은 되살아나,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기억의 소용돌이를 다시 겪게 된다.

'탓'의 무대는 단순한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수사극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작품은 애초에 "누가 죽였는가"보다 "누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가"를 묻는다. 그 책임은 법적 판결로 단순히 정리될 수 없는, 훨씬 더 복잡하고 개인적이며, 기억의 왜곡 속에 얽힌 감정과 이해관계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탓'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원인 규명의 수준을 넘어선다. "누구의 탓인가"라는 질문은 이 극이 지향하는 정서적이고 윤리적인 핵심이며, 관객에게 던지는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다.

가장 눈에 띄는 장치는 '시체의 기억'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무대 위에 누워 있던 유용준은 관객을 향해 직접 말을 걸고, 자신의 죽음에 얽힌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그가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은 완전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말한다. "내 기억이 맞는 건가요? 내가 정말 이렇게 죽은 건가요?" 죽은 자조차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연극은 '기억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냉혹한 사실을 드러낸다. 용준의 시점은 관객에게 가장 가까운 진실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기대, 자격지심, 후회 속에서 진실을 미화하거나 왜곡한다. 작품은 이처럼 진술의 불완전함, 기억의 조작 가능성, 정서적 이입이라는 연극적 장치를 통해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해 나간다.

공연장면 (1)
시체의 윤곽선 앞에서 대치 중인 인물들. 무겁고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연극 '탓'의 블랙코미디적 감정선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 사진 무죽페스티벌 제공
공연장면 (2)
엇갈린 진술과 뒤틀린 감정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연극은 진실보다 강한 '인간의 감정'을 응시한다. / 사진 무죽페스티벌 제공
극의 중심에는 '창식'과 '세란'이라는 인물이 자리한다. 창식은 어린 시절부터 짱으로 군림해 온 괴산 토박이로, 서울에서 성공해 돌아온 용준에게 열등감과 배신감을 느낀다. 그는 친구를 기다려 온 것이 아니라, 복수의 순간을 기다려 온 인물이다. 반면 세란은 두 남자 사이에서 줄곧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 지으며 책임에서 물러서려 한다. 그러나 후반부 그녀의 독백은 모든 서사를 뒤흔든다. "사실은… 창식이가 아니에요." 이 고백이 진심인지조차 우리는 끝내 확신할 수 없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기억과 입장을 말하지만, 그 말들은 서로 충돌하며 더 큰 혼란만을 불러온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지 않는다. 아니, 작품은 진실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대를 이끄는 형사 '충경'과 '경경'은 이 비극의 또 다른 주체다. 그들은 유가족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 '탓'의 구조를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인물들이다. 수사의 목적은 진실 규명이 아닌 실적 확보와 책임 떠넘기기이며, 사건을 넘기기 위한 말장난과 줄자 하나 들고 벌이는 관할권 다툼은 법과 윤리 사이의 공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경북은 어디고 충북은 어디냐"는 구역 논쟁은, 인간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행정 절차에만 몰두하는 오늘날 공권력의 초상을 풍자적으로 비춘다. 그들은 말한다. "다 끝난 사건이다", "마음이 찜찜하다", "참치나 먹자." 무심한 듯 흘러나오는 이 대사들은 깊은 죄책감을 숨긴 채 반복되며 사건의 종결을 선언한다.

형사들의 관점은 끝내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채 사건을 봉합한다. 연극 후반, 그들은 창식과 세란을 체포하면서도 여전히 혼잣말처럼 되뇐다. "우리가 수사한 게 진실이다." 하지만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수사는 불완전했고, 자백은 강요되었으며, 기억은 조작되었고, 감정은 폭주했다는 것을.

'탓'은 연극이라는 매체의 형식적 자유를 최대한 활용한다. 회상과 현실, 환상과 고백이 자유롭게 교차하며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문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마저 희미해지고, 진실과 허구는 서로의 얼굴을 닮아간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유튜브 낚시 방송'은 인상 깊다. 화면 속에서 창식, 세란, 용준이 웃으며 함께 있는 모습은, 죽음과 파국이 결코 진실의 끝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웃고 있고, 사건은 유튜브의 한 프레임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탓'은 결국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기억을 조작하며, '탓'이라는 말로 죄의 무게를 나누는 척한다. 그리고 진실은 끝내 한 사람의 몫으로만 남는다. 관객은 극장을 나서며 묻게 된다. 나는 정말 진실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역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탓'을 떠넘기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연극은 단지 연극이 아니다. 하나의 심문이고, 회고이며, 고백이자 사회 보고서다. 누구의 기억도, 누구의 고백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건 내 탓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가, 어떤 죽음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 채.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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