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염과 폭우, 가뭄과 산불은 이 계절을 경계와 두려움의 시기로 바꿔 놓았다. 많은 사람이 탁 트인 자연보다 냉방이 잘되는 실내 공간, 특히 호텔에서 먹고 자며 쉬는 '호캉스'를 현실적인 피서 대안으로 택한다. 이마저도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먼 이야기일 뿐이다. 숨 막히는 날씨 탓에 사람들은 야외보다 집이나 시원한 카페에 머물며 조용한 휴식을 선택한다. 환경 변화는 여름을 '멈춤'과 '느림'의 정적인 시기로 변모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잊고 있던 존재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떠오른다. 이 작품은 특정 계절을 암시하지 않지만, 여름의 정적과 침묵 속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쿠바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바다를 지킨다.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와 맞서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노쇠한 몸이지만, 그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인내와 끈기로 묵묵히 자연과 맞선다. "사람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패배하지 않는다." 산티아고는 어렵게 잡은 고기를 끌고 돌아오지만, 상어 떼에게 거의 다 빼앗기고 만다. 결국 뼈만 남은 채 귀환하지만, 이 여정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위대한 내면의 승리로 읽힌다. 그의 자세는 성과 중심의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인생을 어떤 태도로 견디고, 기다리며, 받아들여야 하는가?
산티아고의 인내와 끈기는 역사상 위대한 리더들이 공통으로 지녔던 통찰을 떠올리게 한다. 로마 제국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은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즉 '천천히 서둘러라'였다. 그는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제국의 체제를 정비해 로마 역사상 가장 안정된 번영기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를 열었다. 그는 무턱대고 속도를 내기보다 신중함을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과감하게 행동했다. '천천히'는 준비와 숙고, '서둘러라'는 단호한 결단과 실행력을 뜻한다. 이 철학은 후대 황제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상징하는 '닻과 돌고래' 문양을 동전에 새겼다. 묵직한 닻은 안정과 깊이 있는 사유를, 돌고래는 기민함과 즉각적인 실행을 의미한다. 두 상징의 공존은 이상적인 리더십과 균형 잡힌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들도 이 상징에 큰 애정을 보였다. 인문학 서적 출판의 선구자인 알도 미누치오는 이 경구를 자신의 출판 철학으로 삼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비롯해 수많은 고전을 세상에 전하며 인문 정신을 확산시켰다. 그의 출판사 로고에는 '닻을 휘감은 돌고래'가 형상화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상표가 아닌, 삶의 태도를 상징하는 표상이었다. 준비는 철저히 하되, 결정적 순간엔 민첩하게 움직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꽃 대신 그가 남긴 책들로 그의 유해를 장식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발걸음 속도를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진정한 생산성은 속도와 여유, 느림과 결단이 균형을 이룰 때 실현된다. 빠름에는 숙고가, 느림에는 실행력이 동반될 때, 그것은 무모함이 아니라 창조로 이어진다. "우리는 가속의 체증 속에서 꼼짝 못 하고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시간이라는 기차에서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앉아서 성급한 진보에 몸을 내맡긴 많은 사람들은 창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도 바람이 얼굴에 심하게 부딪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달리고 있는 진보라는 기차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창문을 연 채 갈 수 있다." 독일의 시간 학자 칼 하인츠 A. 가이슬러의 말이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에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때로는 방향을 틀어 반대편 풍경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올여름, 잠시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낭만적 들뜸 대신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사색하며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산티아고처럼 내면의 파도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의 육신은 지쳤지만, 정신의 기개는 흩트리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 그의 내면에는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통찰이 깃들어 있었다.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계절은 단순한 휴식이나 체념이 아니라, 자아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문을 열고 반대편 풍경을 바라보듯, 일상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조율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해변으로 가요'를 들으면 여전히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이제 나는 고요 속 조용한 여름을 위해 내면의 물결에 몸을 싣는다. 여름은 변주되었지만, 그 잔잔함 속의 풍요로움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속도에 익숙해진 일상을 멈추고, 나만의 리듬을 다시 맞춰보는 것, 그 작은 용기가 이 여름의 진짜 변주일지도 모른다. 올여름, 당신은 어디에서 내면의 창문을 열려고 하는가?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