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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文香世談] AI 시대, 조르바가 다시 춤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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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0. 2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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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AI 시대, 우리는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니체는 인간의 깊이를 파괴한 최초의 인물로 소크라테스를 지목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가 그리스 비극을 죽였고, 이성과 이성적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고 보았다. 세상은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데, 소크라테스는 밝은 면만 문제 삼고 어두운 면은 외면했기에, 그리스인은 신화적 깊이를 잃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을 미와 빛, 깨어 있는 정신의 상징으로, 디오니소스를 도취와 그늘, 감정의 격정과 감동의 상징으로 설명한다.

니체가 말한 '비극의 죽음'은 문학 장르의 소멸이 아니라, 삶의 어두운 면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태도를 뜻한다. 소크라테스는 고통, 모순, 광기, 비이성과 같은 것을 제거하고 질서와 논리로 세계를 통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신화적 상상력과 비극적 통찰,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잃었다. 삶은 정답을 요구하는 시험지가 되었고, 인간은 해설서만 좇는 존재로 전락했다. 니체는 이 무미건조한 삶을 구원하기 위해 디오니소스를 다시 불러냈다. 도취와 감정, 실패와 열정, 미친 듯한 사랑과 죽음을 껴안는 존재야말로 삶의 혼돈 속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원초적 본능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은 아폴론적 질서와 디오니소스적 혼돈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꽃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니체 철학을 소설로 구현한 대표작이다. 조르바는 디오니소스가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다. 소설은 한 젊은 지식인이 크레타섬에 광산을 개발하러 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책과 이론을 신뢰하는 전형적인 아폴론적 인간이다. 그러나 조르바를 만나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마주한다. 조르바는 춤추고 노래하며 욕망하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는 자유롭게 연애하고, 창녀를 돌보며, 가난한 이들과 빵을 나눈다. 술과 노동, 쾌락과 고통, 욕망과 좌절, 이 모든 것이 조르바에게는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다.

그는 삶의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고통을 구분하지 않고 껴안는 인간형이다. 두 사람은 함께 광산을 개발하지만, 결국 사업은 실패로 끝난다. 모든 자본은 날아가고, 구조물도 무너진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서 조르바는 춤춘다. "희랍인은 패배할 수는 있으나, 파멸되지는 않는다." 그는 무너짐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눈물 대신 춤으로 응답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의 구현이다.

오늘 우리의 삶을 둘러보자. 수많은 수치와 통계, 경쟁과 효율이 절대 가치가 되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직장, 안정된 조건, 예측 가능한 미래를 위해 오늘의 삶을 유예한다. 욕망과 감동, 예술과 놀이, 우정과 소소한 기쁨은 "지금은 참아야지"라는 말에 밀려난다. 이는 니체가 비판한 '헤브라이즘(Hebraism)'의 현대적 재현이다. 니체에게 헤브라이즘은 이성적 질서를 내세의 완벽함에 종속시키며 현재의 삶을 억압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 삶의 태도는 도덕과 절제, 규율에 바탕을 두어 존재를 통제하고 질서화하는 데 집중한다. 반대로 '헬레니즘(Hellenism)', 즉 그리스인적 삶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그곳의 추위와 더위를 기꺼이 감수한다. 삶을 억누르기보다 즐기며,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표현하고, 고통과 실패마저도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오늘날 우리는 신의 계율 대신 인공지능의 지시와 평가에 복종하며, 자신을 더 예측 가능한 존재로 바꾸려 한다. SNS 알고리즘과 감정 분석 기술, 직장 내 평가 시스템 등은 효율과 정확성을 극대화하며, 이상적인 인간형을 오류 없는 존재로 규정한다. 감정과 변덕, 충동과 실패는 점차 결함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경향은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 삶을 규율하는 새로운 '현대적 헤브라이즘'으로 기능함을 시사한다. 과거 초월적 구원의 이름 아래 현재를 억제하던 질서가, 이제는 기술적 완전성과 미래지향적 예측 가능성의 이름으로 재현되고 있다. 오늘 사람들은 감정의 떨림을 잃고, 무엇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무엇에 아파하고 기뻐하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삶의 미묘한 색채가 사라지고 존재감은 희미해진다. 우리는 점점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AI의 효율성은 아폴론적 질서의 현대적 극단이지만, 우리는 그 질서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르바의 춤으로 그 질서를 재해석해야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틀릴 수 있는 용기, 실수를 끌어안을 배짱, 감정을 드러내는 솔직함, 감동과 쾌락을 온전히 누리는 자유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삶의 구석구석을 점령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선택과 행동, 감정마저 예측과 통제의 대상이다. 오류 없는 인간, 계획된 인간이 이상형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실수 없는 삶이 과연 인간다운 삶인가? 실패를 감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조르바가 다시 필요하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완벽한 해답을 내놓더라도, 우리는 틀릴 수 있어야 하고, 실패할 수 있어야 하며, 울 수 있어야 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조르바는 춤으로, 눈물로, 웃음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삶은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 비논리적인 감정, 원인과 결과가 맞지 않는 우연, 불완전한 인간성. 그 모든 것들이 삶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운명을 사랑하는 인간, 바로 그 인간이 현대의 조르바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우리도 춤추자.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자갈밭에서 춤추는 조르바를 떠올리며, 팔을 벌리고 고개를 들고, 디오니소스의 숨결을 따라 춤추자. 이것이야말로 어떤 인공지능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삶이 아니겠는가.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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