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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은 미국과 소련의 진영 편제작업의 최일선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지역강국이던 이집트는 진영을 선택하라는 양측의 외교적 압박을 받았다. 1955년 2월 영국의 이든(R. A. Eden) 외무장관은 이집트를 방문해 나세르(G. A. Nasser) 대통령에게 바그다드 조약(Baghdad Pact) 가입을 촉구했다. 카이로의 영국 대사관저 만찬 환담에서 서구의 대(對)소련 적대전략에 대한 나세르의 반대 입장이 완강하자 이든은 아랍의 속담 하나를 말했다. "엘리사닉 후세닉(ElLisanik Husanik; Your tongue is like your horse)." 이는 혀는 말(馬)과 같아서 통제하지 않으면 난폭하게 된다는 뜻인데 나세르에게 대한 경고였다.
외교적 압박은 소련으로부터도 가해졌다. 미국이 무기판매를 거절하자 이집트는 무기도입과 아스완하이댐 건설계획까지 소련과 일련의 협력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1959년 아랍 공산당이 무장폭동과 해방구 창설에 나서자 나세르는 통일아랍공화국 내에서 공산당 당사(黨舍)를 폐쇄하고 탄압했다. 이에 흐루쇼프(N. Khrushchev) 소련공산당서기장은 나세르에게 서한을 보내 "언젠가 다시 마시게 될 테니 우물에 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러시아 속담을 인용해 경고했다. 이후에도 나세르는 미·소 양대국과 타협과 대결을 번갈아 하면서 수에즈 운하 국유화와 아스완하이댐 건설에 협조를 받았다. 수에즈전쟁에서는 두 나라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군의 철군을 강요했고 6일 전쟁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연대해 석유를 무기화하면서 서구경제를 오일쇼크에 빠트렸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인도와 함께 비동맹운동(NAM)을 창설해 새로운 외교 공간을 만들고 자원민족주의와 핵전쟁 위험을 경고하면서 미·소 간 협력 분위기를 추동했다.
냉전학자 개디스(J.L. Gaddis)는 때로는 변방의 약소국도 주동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반공포로 2만7000여 명을 전격 석방하면서 '자유'와 '동포애'라는 제3의 협상공간을 열었다. 개디스는 '냉전의 역사'에서 이것을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명백한 사례로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의존적 동맹국(dependent ally)이라 해서 반드시 순종적 동맹국(obedient ally)은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승만의 주장 중 가장 효과적인 내용은 만약 미국이 지원하지 않으면 국가가 붕괴될 것이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입지는 훨씬 열악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며 소련 역시 북한의 김일성에게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부언했다.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 북한이 중국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약소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책을 의미한다.
게임 주관국인 미국 역시 과거 유럽 열강에 의해 밸런스 게임에 처했던 경험이 있던 나라다. 1796년 조지 워싱턴(G. Washington)은 대통령 3기 추대를 사양해 세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모범적 선례를 남겼다. 그리고 '퇴임 고별사'에서 후임 대통령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국가 간에 진정한 후의를 기대하거나 예측하는 일보다 더 큰 과오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기대는 경험이 깨우쳐 주는, 그리고 올바른 자존심에 의해 마땅히 내버려야 하는 환상입니다." 이는 철저한 자국 중심의 현실주의였다.
패전 후 일본은 "정경분리"와 "전방위 외교"를 주창하며 수출에 전념해 경제력을 키웠다. 21세기는 한국에 상품 교역 외에 금융 협력과 자원보유국가들과의 자원협력과 같은 외교역량의 다변화가 중요한 시기다. 따라서 2013년 우리 정부 주도로 중견국가협의체 MIKTA(Mexico, Indonesia, Korea, Turkiye, Australia)를 구성해 외교지평을 확대한 것은 유의미하다. 중동 최대 규모의 미(美) 공군기지를 유치한 카타르 그리고 미국의 최우방국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와 같은 GCC(Gulf Cooperation Council, 걸프 협력 회의) 보수왕정 국가들이 비동맹(NAM) 회원국으로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사실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러시아와 사실상 동맹국 관계인 북한이 비동맹회원국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것도 방관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 중국과의 탈동조화(decoupling)는 경제 외에 국방과 평화통일까지 헌법상의 우선적 가치에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미국과의 강고한 동맹관계를 감안하더라도 적극적 북방외교는 필수적이다. 변방국가의 게임의 룰은 긴 호흡으로 국가의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고 잠시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국가의 장기 비전을 소거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국가 간의 현안을 일거에 모두 해결하겠다는 '가벼움'과 '조급함'은 게임의 주관자와 참여자 모두에게 정확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은 선택이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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