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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 칼럼] 미중대결을 바라보는 세계문명사적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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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0. 29. 18:03

CHOI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미국의 패권에 중국이 도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미국이 세다 하고, 어떤 사람은 중국이 세다 한다. 미중대결의 열쇠를 한국이 쥐고 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오직 패권경쟁의 시각으로만 미중대결을 바라보는 것은 다소 천박하다. 세계문명사의 시각에서 미중대결을 조망할 필요가 있다.

미중대결이 서양문명과 중국문명의 대결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19세기 이래 지금까지 서양 백인들의 근대문명이 세계를 휩쓸었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힘 앞에 무릎을 꿇는 굴욕을 감내해 오다가 21세기 들어 마침내 '대국굴기(大國屈起)'의 중국몽을 실현하고 있다. 세계사적 복수혈전이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중국은 1919년 5·4운동을 계기로 자신의 전통문명을 내동댕이치고, 좌와 우를 막론하고 중국인들의 표현대로 '전반서화(全般西化, total westernization)'의 길로 접어들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그랬듯이 대륙도, 대만도 모두 '전반서화'였다.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근대문명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문명이었다. 중국도 일본도 한국도 자신들의 고유한 문명의 전통을 내다버린 지 이미 오래됐다.

그렇다면 미중대결은 서양문명 대 중국문명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문명 대 서양문명의 대결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류 서양문명' 대 '아류 서양문명'의 대결이다. 미국은 유럽문명의 적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반면 중국은 자신들의 문명을 몽땅 내다버리고 유럽과 미국을 따라가기에 급급하지만 아직은 그 한계가 역력하다. 그래서 그 노력은 가상하지만 아직은 아류인 것이다.

오늘날 중국 인구는 14억이다. 만약 근대 과학기술문명을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중국 인구는 5억을 넘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수십 년간의 급속한 경제발전도 과학기술문명과 미국의 개방성 덕분이다.

중국은 서양에 감사할 이유가 충분해 보이지만 감사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는 듯하다. 근대 이전의 전통시대에는 한때 중국의 과학기술이 서양보다 앞섰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 과학기술은 수학이라는 엄밀한 합리적 사유에 근거하지 아니한 과학기술이었다.

수학에 의거하는 근대 자연과학은 과학혁명을 통해 탄생했고, 산업혁명을 통해 실용적 기술과 접목되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과학기술문명의 위력에 힘입어 지금껏 유럽과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과학기술문명을 배우기에 바쁘다. 과학기술문명을 모르면 빈곤과 후진성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식으로 서양근대문명은 이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명이 되었다.

중국문명에 없었던 것은 과학기술뿐만이 아니었다. 합리적 사유에 근거하여 체계적 지식 즉 '학문(scientia)'을 만드는 전통 자체가 중국문명에는 없었다. 오늘날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과 인문과학까지 대학에서 가르치는 모든 학문은 서양근대의 것들이다. 심지어는 '중국학'이나 '한국학'까지 알고 보면 서양식 학문이다. 자료만 중국 것 혹은 한국 것일 뿐 그 기본원리는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문명의 전통에서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은 나올 수 없다. 칸트나 헤겔도 나올 수 없고 다윈이나 마르크스도 나올 수 없다. 체계적 지식으로서의 학문을 만드는 전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런 학문을 만들어내는 개인의 자유, 개인의 창의를 존중하는 전통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이 힘쓰고 있는 국가주도의 창의력 개발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미중대결에서 중국이 미국을 이긴다면 어떤 사람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지 않는 중국이 세계의 패권국가로서 과연 새로운 세계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여러 모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20세기 이후 중국이 세계문명에 기여한 바가 중화요리 외에 또 있는지 의심스러운 판국에, 중국의 야심적인 '일대일로' 전략은 이미 세계 곳곳의 저개발국가에서 원성을 사고 있다. 어떤 사람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끝나고 '팍스 시니카'가 시작되면 세계사의 암흑기가 도래할지 모른다고 깊이 우려한다.

미국과 중국의 고래싸움에서는 한국은 자칫 잘못하면 등 터지는 새우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중재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무한정 양쪽 눈치를 보기도 어렵다. 아마도 결국은 어느 한쪽 편에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전의 국익도 중요하지만 세계문명사의 미래까지 전망하면서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세계문명사의 미래가 한국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도 아니고 6·25 때의 그 한국도 아니다. 한국은 이미 세계사의 키 플레이어(key player)가 되었음을 알고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어떤 대국이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라도, 한국과 세계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이, 어느 힘센 나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는 자신이 얻을 목전의 이익이나 권력 혹은 자신의 머릿속 알량한 이념 때문에, 섣불리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면 이완용보다 백 배, 천 배 더 나쁜 세계사적 범죄자가 될 것이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서강대 졸. 한국학대학원 석사. 서강대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국학대학원장, 장서각관장 역임. '주자학을 위한 변명'(2000), '인문학, 유학, 그리고 철학'(2004) 외 논문과 공저 다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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