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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난은 50분 남았다’, 마지막을 지켜보는 시간의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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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1. 04. 08:00

제7회 노작홍사용창작단막극제 대상 수상작, 조력자살을 둘러싼 가족의 대화
삶의 끝머리에서 남겨진 이들의 50분,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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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앞두고 진행된 '나의 고난은 50분 남았다' 연습 장면. / 사진 극단 해동머리
한 사람의 마지막 50분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바라보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곁을 지키는 가족의 시간이다. 제7회 노작홍사용창작단막극제에서 대상과 희곡상을 동시에 수상한 연극 '나의 고난은 50분 남았다'는 조력자살이라는 섬세하고도 논쟁적인 주제를 통해 인간의 존엄과 선택, 그리고 관계의 끝에 남는 여운을 탐색한다. 작품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현실적 시간 속에 담아, 관객이 죽음을 마주하게 될 과정을 그려내고자 한다.

무대는 스위스의 한 숙소, 귀국을 앞둔 여행의 마지막 아침이다. 필과 그의 아내 소영, 그리고 장남 대규는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평범한 아침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짐을 정리하며 예민해진 아내, 그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남편, 공항까지 이동할 차편을 확인하는 아들. 세 사람의 일상적인 대화 뒤에는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무언의 약속이 맴돈다.

작·연출을 맡은 김택수는 "삶의 의미를 더 이상 찾아낼 수 없기에 스스로의 삶을 종식시키는 조력자살이라는 행위에 찬반을 단정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윤리적 입장보다 관찰자의 시선에 주목했다. 작품은 찬반의 논리를 넘어, 그저 '지켜보는 시간'에 집중하고자 한다.

김택수는 인물들에게 남은 50분의 시간을 현실의 리듬으로 풀어내는 '리얼타임 구조'를 통해 관객이 그 시간 속을 함께 걸어가도록 의도했다. 무대 위에서 흘러가는 분침은 인물들의 숨결과 겹치며,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공감의 자리로 옮겨질 것으로 보인다.

연출은 인위적인 감정선을 배제하고 현실의 결을 살린 절제된 방식을 택했다. 김택수는 1998년 연극 '중독'으로 데뷔한 이후 '리투아니아', '더 타이거', '밤의 방문객', '홀연했던 사나이' 등 다양한 작품을 연출하며 인간 내면의 리얼리즘을 꾸준히 탐구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감정의 폭발보다 절제된 호흡을 선택해 인물의 내면을 담담하게 드러낼 것으로 기대된다. 김택수는 "제3자의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기 위해 극의 온도를 가능한 한 낮췄다"고 밝히며, 감정의 절제 속에서 인간적 존엄을 바라보려는 연출 의도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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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앞두고 진행된 '나의 고난은 50분 남았다' 연습 장면. / 사진 극단 해동머리
노작홍사용창작단막극제 심사위원단은 수상 이유에 대해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의 내면이 아닌, 가족의 대화와 반응을 통해 죽음을 사유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기존의 죽음 서사가 죽음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묘사했다면, 이 작품은 남겨진 자들의 시간에 초점을 맞춘다. 관객은 필의 시선이 아닌, 가족 간의 대화를 통해 '죽음 이후의 삶'을 상상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개인의 고통을 넘어 사회적 관계 속의 죽음을 사유하는 시도로 읽힌다. 죽음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관계의 이별과 대화의 단절로 바라보며, 작품은 삶과 관계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연극 '나의 고난은 50분 남았다'는 2025년 11월 5일부터 16일까지 제이원씨어터에서 공연된다. 무대에는 세 배우가 선다. 필 역의 김필은 1990년 연극 '13학년생의 방황'으로 데뷔한 베테랑 배우로, '오셀로 두 시대', '하이타이' 등에서 강한 인상과 내면 연기를 보여왔다. 소영 역의 정소영은 1995년 '여자의 적들'로 데뷔해 '마녀', '공원벤치가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 등에서 현실적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해 온 배우다. 대규 역의 이대규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수업', '동물원 이야기' 등 젊은 무대에서 활약하며 감정의 농도를 세밀하게 조율해 왔다. 세 배우의 세대 차이는 실제 가족 관계의 현실감을 더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 그 자체에 집중해, 관객이 인물들과 같은 호흡으로 마지막 순간을 체감하도록 구성됐다. 무대 위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세 인물의 감정과 관계를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관객은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죽음을 기다리는 가족의 표정, 말하지 못한 한숨을 바라보며 자신 안의 기억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연극은 조용하지만 깊은 목소리로 묻는다. "삶의 끝머리, 단 50분이 남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나의 고난은 50분 남았다'는 죽음을 다루지만 비극을 드러내기보다 인간의 선택을 바라보는 차분한 시선을 지향한다. 작품은 조용한 호흡으로 생과 사의 경계를 응시하며 관객에게 사유의 여백을 남긴다. 극중 남은 50분이라는 설정 속에서 인물들이 어떤 감정과 관계를 오갈지는 아직 열려 있지만, 그 정적의 순간마다 관객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스위스의 작은 숙소 안에서 펼쳐지는 이 짧은 여정은 결국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무대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 객석의 시간 또한 조용히 멈춰 서는 듯한 여운을 남길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대화 속에서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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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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