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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WTO’ 빠진 경주선언…자유무역 위기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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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03. 00:00

이재명 대통령이 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
지난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폐막 직전까지 정상회의 공동선언 채택을 놓고 진통을 겪었다. 2일 오전 폐막을 몇 시간 앞두고 어렵게 '경주선언'이라 불리게 될 공동선언이 나왔지만 '자유무역'이나 '세계무역기구(WTO)'란 단어는 결국 빠졌다.

1989년 각료 협의체로 출발할 때부터 다자무역 정신은 APEC의 전제이자 모토였다. 역대 APEC 선언은 자유무역에 대한 지지를 바탕에 깔고 WTO 체제 옹호를 언급하는 방식으로 다자주의를 지향해 왔다. APEC 정상회의가 미국 대통령의 본행사 불참 등으로 파행을 겪었던 2017∼2021년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종료 이후부터는 이에 관한 '정형화된 표현'이 매년 들어갔다. 즉 'WTO가 그 핵심을 이루는(WTO at its core) 규칙 기반의 다자간 무역 체제'라는 구절이다.

경주선언에 이를 대체한 문구가 있긴 하다. '우리는 견고한 무역 및 투자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성장과 번영에 필수적이라는 공동 인식을 재확인한다',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 경제 협력을 계속해서 심화시켜 나갈 것을 약속한다'는 등이다. 하지만 규칙에 기반한 다자무역 체제라는 구절에 비해서는 훨씬 모호하고 구속력이 약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얼마나 APEC을 비롯한 다자협의체를 흔들고 있는지 보여준다. 당초 경주선언에서 다른 단어는 빠지더라도 'WTO'만큼은 남으리라는 관측이 많았다. 결과는 수년간 들어갔던 표현이 통째로 빠진 것이다. 미국의 반대 때문이었다. 미국은 'WTO' 표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반면 중국을 포함한 다수 회원국은 이에 맞섰다고 한다. 지난 5월 제주에서 열린 통상장관 회의 때부터 중국 측은 다자주의를 강조하고 보호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고, 미국은 이 구절이 성명에 들어가는 걸 반대했다.

양국의 첨예한 갈등 때문에 경주선언 자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전망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유무역과 이를 주도해 온 규칙 제정자 WTO체제 무력화가 점점 굳어지는 것은 한국에는 두려운 일이다. 전후 자유무역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가 우리이기 때문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폐막일까지 경주에 머무르며 APEC의 무게감을 더한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APEC 본회의 직전 귀국한 것과 대비된다. 트럼프가 APEC '훼방꾼' 역할을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으면서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열어줬다는 지적이 미 언론에서도 나왔다. 내년엔 중국이 APEC 의장국이다. 이런 흐름이 더 빨라질 수 있다. 미중 간 '넛 크래커'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미중 간 미세한 세력 변화까지 면밀히 살피고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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