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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인터넷 시대의 상징이자 시가총액 세계 1위였던 시스코(Cisco) 시스템즈의 주가가 정확히 25년 만에 다시 그 고점을 회복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시장의 기대가 현실과 괴리될 때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그리고 회복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기술적 변곡점에 서 있다. 챗GPT로 촉발된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은 엔비디아를 새로운 제국의 중심으로 세웠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 투자 경쟁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 화려한 잔치의 이면에는 '닷컴 버블'이라는 오래된 유령이 다시 배회하고 있다. 과연 현재의 AI 열풍은 생산성에 기반한 지속 가능한 '호황(Boom)'인가, 아니면 기대가 현실을 앞질러 달리는 '거품(Bubble)'의 초입인가.
호황과 거품의 경계는 얇아 보이지만, 그 본질은 분명히 다르다. 호황은 기술 혁신이 기업의 실질적인 이익과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될 때 형성된다. 주가 상승과 함께 기업의 내재 가치, 즉 현금 창출력과 수익성이 동시에 성장한다. 반면 거품은 '기대'가 '현실'을 압도할 때 생긴다. 미래에 벌어들일 것이라는 낙관이 현재의 손실을 정당화하고, 기업 가치가 아니라 '나보다 더 비싸게 사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가격을 떠받친다.
WSJ이 지적하듯, 지금의 시장 지표는 닷컴 시대와 닮은 경고음을 낸다. 당시 통신사들은 광케이블 구축에 100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었고, 지금은 수조 달러의 자금이 AI 데이터센터로 몰리고 있다. 시장은 AI 관련 종목에만 열광하며 나머지 기업을 외면하는 '편식 장세'를 보이고, 닷컴 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다시금 AI 시대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물론 중요한 차이도 있다. 닷컴 시대의 다수 기업은 매출조차 없었지만, 오늘날의 빅테크들은 막대한 현금흐름을 창출하고 있으며, AI 기술은 이미 상용화 단계에 진입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핵심 질문은 변하지 않는다. "AI가 투입된 비용만큼의 수익, 즉 실질적인 ROI(투자 대비 수익)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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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포모(FOMO·소외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 휩쓸린 보여주기식 투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쟁력 확보를 위한 선제적 투자가 요구된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살아남을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는 멈춰서는 안 된다. 닷컴 붕괴 이후 살아남아 거목이 된 기업들은 위기 속에서도 내실 있는 투자를 통해 확실한 기술적 해자(Moat)를 구축한 곳들이었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기회는 준비된 주체에게만 열린다. 25년 전 인터넷이 그랬듯, AI는 우리 경제와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지금은 거품이 터질지 두려워 손을 놓을 때가 아니다. 과열은 관리하되 성장은 이어가는 균형 감각, 그리고 단기 변동성 너머를 바라보는 전략적 시야가 필요한 시점이다. 가장 현명한 선택은 광기에 휩쓸리는 것도 공포에 마비되는 것도 아닌, 변화의 본질을 꿰뚫고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