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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산가족 찾기, 세계가 주목했지만 아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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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9. 0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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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이산가족찾기 '유네스코 역사기록유산' 등재
그러나 분단 후 30년 간 이산가족 간과한 것은 부끄러운 일
아직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놓치는 사안 없는지 잘 살펴야
정기종 전 카타르대사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1983년 여름, 서울 여의도에서는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행사 중 하나가 있었다. 남북 분단 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1·4 후퇴 당시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남으로 온 피란민들을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이산가족들이 주인공이었다. 6월 30일 KBS가 기획한 한국전쟁 33주년과 휴전협정 30주년 기념 2시간 특집물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방영되었다. 프로그램은 예상외로 많이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연장방송이 되어 138일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초대형 국가행사가 되었다. 총 10만952명의 이산가족이 상봉 신청을 했고 이 중 절반 정도인 5만3536명이 소개되어 1만189명이 가족을 찾았다. 그동안 일부 이산가족들은 암암리에 그들의 사적 자원과 전화, 신문광고 등을 통해 국내 또는 북한 내 가족과의 연결이 성사되었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제3국을 통해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한 사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여의도 KBS 기자실에는 25개국에서 온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상봉 소식을 실시간으로 해외로 송출했다. 하비에르 유엔 사무총장은 남북이산가족의 비극에 깊은 동정과 이해를 표시했고 세계언론인대회는 이 프로그램을 '1983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했다. 골드 머큐리 세계평화협력회의 총회는 KBS에 '1984 골드 머큐리·애드 호너렘상'을 수상했다. 전쟁의 상처를 고발하고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전 세계인에게 고취시킨 공로상이다. 그리고 2015년에는 KBS 이산가족찾기 기록물이 '유네스코 역사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이것은 한국에 있어서 더구나 정부에는 자랑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국제사회가 남북 모두에게 제기하는 질문일 것이다. 첫째로 분단 이후 30년이 지난 후에야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산가족들이 그동안 이 같은 행사를 왜 시도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다. 둘째로, 언론기관이 1회성 프로그램으로 시작해 이산가족들의 쇄도로 초대형 장기 행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정부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985년 9월이 되어 남북한은 적십자사를 중심으로 최초로 공식적인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50명씩 3박 4일간 실시했다.

남북 이산가족의 스토리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남북한의 새 박사 부자로 유명한 원홍구, 원병오 두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이산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1963년 아들 원병오 박사가 서울에서 쇠찌르레기 철새 다리에 끼워 보낸 연구용 가락지가 2년 후인 1965년 평양의 북한 생물학연구소장인 아버지에 채집된다. 아버지 원홍구 박사는 가락지에 찍힌 일본 농림성 마크에 따라 일본에 없는 쇠찌르레기의 소재를 도쿄의 국제조류보호연맹(BirdLife Int'l) 아시아 본부에 문의하면서 한국에 있는 아들의 이름과 소재를 확인하게 된다. 이후 이들은 제3국을 통해 서신만을 교환하고 만나지 못한 채 1970년 10월과 2020년 4월 각각 사망했다. 1992년 일본은 북한과 합작으로 이들 부자의 이야기를 영화 '버드(Bird)'로 만들어 제5회 도쿄국제영화제에 출품 상영했다. 영화는 한반도 분단에 일정 부분 책임을 갖고 있는 일본이 국제사회로 발신하는 남북한의 냉혹한 현실과 일본의 역설적인 평화 제스처의 하나가 되었다.

1983년 국내에서 이산가족이 남과 북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었던 것은 한국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사회 분위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이산가족이고 북한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가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거나 직장에서 당할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따라서 이 같은 점을 고려하더라도 정부는 국내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위한 공식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 남북 간 이산가족의 경우에도 인도주의를 앞세워 상봉을 추동하면서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압박을 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민의 천부적 권리와 인륜을 잇는 방법을, 안보를 위한 조치를 병행하면서도 추진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중에 한국전쟁 후에 수백만 명에 달했던 이산가족의 수는 2000년대 들어서는 소수의 고령층이 되었다. 멀지 않은 시기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고 이러한 사실은 역사의 한 장에 기록될 것이다.

한 국가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대외관계에서의 역량이 반영된다. 그러나 정부의 자국민에 대한 사안들이 그 나라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특히 자국민의 인권에 대한 사안은 유엔과 국제사회의 주된 관심사다. 유엔이 말하는 굿 거버넌스의 문제로 국가의 휴머니즘에 대한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수백만 명의 인권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으로 과거 동서독과 중국-대만 간의 사례와도 비교될 수 있다. 이 같은 측면에서 1983년 이산가족찾기기록물의 '유네스코 역사기록유산' 등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크다. 더구나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30년 후에 비로소 국내 이산가족들의 상봉이 이루어진 것은 그동안 누적된 국민 상당수의 사기 저하와 기회비용의 지불을 뜻한다. 국민은 그 자신 수준의 정부를 갖는다는 말은 틀린 말일 것이다. 국민의 수준을 만드는 것은 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아직도 우리 사회 내에는 간과되고 있는 이 같은 사안들이 없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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