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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AI 시대, 경청이라는 오래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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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9. 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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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 부해장 사진
하정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회계감사부문 전문위원.
금융기관에서 30년 넘게 일하는 동안 내 자리는 대부분 치열한 시장을 마주하는 트레이딩 데스크였다. 조직을 이끌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컨설팅 회사에서 고문으로 일하며, 직접 매매를 책임지던 때와는 조금 다른 거리에서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현장의 여러 리더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예전 내 고민이 겹쳐 보이고, '그 시절 나는 직원들과 시장의 목소리를 얼마나 제대로 듣고 있었는가' 스스로 되묻게 된다.

트레이딩 조직을 이끌던 시절, 회의실에서 어느 순간 직원들이 입을 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돌아보니 그들의 생각을 충분히 듣기도 전에 내가 먼저 결론을 내리는 일이 잦았던 탓이었다. 경험이 쌓인 만큼 답도 잘 안다고 자만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중간에 말을 보태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도 꾹 참고 끝까지 들어보려 애썼다. 내가 말을 줄이자 직원들이 자신의 논리를 펼칠 여지가 생겼고, 자연스레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 커졌다. 최종적인 책임은 여전히 내 몫이었지만, 판단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만으로도 조직의 공기가 사뭇 달라질 수 있음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경청을 가로막은 것은 시간 부족도, 직원들의 서툰 설명도 아니었다.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오래된 오만이었다. 익숙한 논리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경험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의견에는 쉬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말을 끝까지 듣는 연습은 결국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연습에 다름 아니었다.

개미는 한 지도자의 지시가 아니라 동료들이 남긴 신호에 반응하며 길을 찾는다. 서로의 신호에 귀 기울이는 능력이 집단의 생존을 이끄는 셈이다. 코로나19 당시 시장이 대폭락하며 트레이딩 데스크의 손실이 깊어질 때가 그랬다. 기계적인 손절매가 불가피해 보이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도, 현장의 딜러들은 펀더멘털과 수급 상황을 근거로 특정 포지션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무조건 그들의 주장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딜러들이 포착한 낯선 신호는 내게 판단을 되짚어볼 결정적 계기를 주었고 결과적으로 훌륭한 성과로 이어졌다.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조직을 지탱한 것은 리더 한 사람의 단단한 확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자리에서 포착한 미세한 신호를 경청하고 유연하게 대응해 낸 힘이었다.

요즘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들은 그때보다 훨씬 정교한 도구를 손에 쥐고 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분석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정작 경계해야 할 순간은 그 분석 결과가 내 생각과 기분 좋게 맞아떨어질 때다. 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만 AI를 활용하고 검토를 마친다면, 오래된 편견과 자기 확신만 단단해질 뿐이다. 오히려 내 판단과 완벽히 일치할 때야말로 스스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한 발 더 들어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반대로 AI가 내놓은 결과나 동료의 시각이 내 생각과 다를 때는, 왜 그런 이견이 나왔는지 귀 기울여 듣고 치밀하게 분석해 보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시장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틀로 지금의 가격 흐름이 설명되지 않을 때, 그 낯선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내가 아는 시장과 실제 시장 사이의 거리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호가와 거래량의 미세한 변화, 현장에서 오가는 거친 이야기 속에 기존 전망을 흔드는 정보는 없는지 한 번 더 짚어보아야 하는 이유다. 물론 모든 낯선 신호가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단지 내게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검토할 가치마저 깎아내려서는 곤란하다.

결국 조직에서든 시장에서든, 내 생각과 다른 신호 앞에서 곧장 결론으로 건너뛰지 않고 '잠시 머물러 보는 태도'가 핵심이다. AI 덕분에 데이터 정리에 드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었다면, 그렇게 아낀 시간은 나와 다른 의견과 불편한 시장 신호를 한 번 더 들여다보는 데 써야 마땅하다. 경청이란 결국 내 판단의 빈틈을 스스로 메워가는 겸손한 습관이다.

현역에서 물러나 후배들과 시장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여전히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새삼스레 배운다. 연륜이 쌓였다고 해서 듣는 일이 저절로 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 역시 익숙한 답부터 섣불리 꺼내려는 순간을 끊임없이 경계하려 한다. 사람과 시장 앞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고, 한마디 더 귀 기울여 듣는 것. AI 시대에도 결코 퇴색되지 않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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