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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남한보다 먼저 단독정부 세웠다.

김일성, 남한보다 먼저 단독정부 세웠다.

기사승인 2015. 09. 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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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0일에 스탈린이 지령
김일성 수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다음날인 1948년 9월 10일 김일성 수상이 연설을 하고 있다.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14편


오는 9월 9일은 북한 정권 창건 67주년이 되는 해다. 1948년 9월 9일은 북한정권 수립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은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인 10월 10일과 함께 북한의 사회주의 5대 명절 중의 하나로 꼽힌다.

북한은 이에 걸맞는 거창한 행사를 벌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올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립 69주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1946년 2월 8일에 이미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1946년 2월 8일 ‘북부 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각 행정국,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확대협의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북조선의 중앙행정기관으로 ‘북조선임시위원회’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다음 날인 2월 9일에 ‘북조선 인민의 의사를 대표할 위원 선거’에 들어가 김일성을 포함 23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 강양욱이 뽑혔다.

김일성 등장
1945년 10월 14일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나타난 김일성 . 김일성 옆에 마하일 강 소련 군대 소좌가 있고 뒤쪽에 소련 장군 몇 명이 있으며 소련 국기 및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1946년 2월 8일 사실상 북한 단독정부 수립

이 확대협의회가 열린 첫날인 2월 8일에 김일성이 행한 조직문제에 대한 연설문을 보면 “오늘 북조선에 중앙 주권 기관을 조직하는 것은 완전히 성숙된 과업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통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이런 기관으로 되어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중앙 주권 기관을 조직할 목적으로 북조선의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발기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소련군사령관도 발기 위원회의 의견을 지지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통일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단순한 중앙행정기관 역할 뿐만 아니라 주권기관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즉 북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내세운 것이다. 그리고 당일 결성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주권기관이 된다는 것을 정한 것이다.

김일성 계급장
1945년 8.15 이후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가운데)의 가슴에 달린 소련훈장을 소련군 정치장교가 장난스레 만지고 있다.
◇국내 중고 검인정 역사교과서, 이승만 단정 책임자로 서술

당시 남한 인사로서 제일 먼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언급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단정 수립론’에 대해 처음 말문을 연 것은 1946년 6월 3일의 이른바 ‘정읍 발언’이다. 이 정읍 발언을 찍어서 북한과 한국사학계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민중사학계는 지금까지도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의 원흉이 이승만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민중사학 그룹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역사인식으로 대부분의 중고교 검인정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있기 4개월 전에 북한에는 이미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의지 천명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보다 6개월이 앞선다. 1945년 12월 17일부터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 3차 확대위원회’에서 ‘진정한 인민정부 수립을 위하여’라는 김일성의 보고를 보면 나와 있다.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에 관한 규정’ 제 3조를 보면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있어서의 중앙행정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의 인민사회단체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 발표할 권한을 갖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중앙행정기관으로서 법령을 제정하고 발표한다는 것은 바로 정부를 말하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누가 먼저 수립했는지는 이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북한은 남한보다 2년 6개월 이상 앞서 실질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반면 남한은 1948년 8월 14일까지 미군정 아래 남아 있었다.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일자를 대한민국보다 25일 늦은 48년 9월 9일로 잡은 속셈은 따로 있었다. 남한이 먼저 단독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북한은 어쩔 수 없이 단독정부를 수립했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즉 단독정부 수립, 분단 책임을 이승만과 대한민국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처음 열린 것이 1946년 3월 20일이다. 그런데 소련의 꼭두각시였던 김일성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되기 전인 46년 2월 8일에 서둘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권을 서둘러 만들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서울 중앙청에서 거행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그러나 북한은 이보다 2년 6개월 정도 앞선 1946년 2월 이미 사실상의 북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있었다.
◇스탈린, 1945년 9월20일 김일성에 북한단독정부 지령

그것은 바로 북한 단독정부 수립이었다. 여기서 한반도의 분단이 시작되었다. 왜 김일성은 이런 반민족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 의문의 실마리는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93년에 와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한소 수교 이후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단독정권을 수립하도록 지시한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암호지령문’이 뒤늦게 공개된 것이다.

이 암호지령문은 소련군 최고 사령관 스탈린 및 안토노프 총참모장이 발신자로 되어 있고 바실레프스키 극동전선총사령관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가 수신자로 되어 있다. 이 전문에는 북한 점령에 대한 7개 항목의 지시사항이 열거되어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최초로 내린 지시 문서였다.
그 제 2항목에 “북조선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 조직의 광범위한 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부르조아 민주주의 단독정부 수립 지시였다. 즉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노선을 한반도에서도 관철시키라는 지시인 것이다.

이 지시에 따라 1945년 10월 10일에서 13일까지 평양에서는 ‘조선 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비밀리에 열렸다. 이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했고 45년 12월 17일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부터는 스탈린의 지령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스탈린은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당명을 쓰면서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등장시킨다.

책임비서로 등장한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북조선 공산당의 첫째 가는 과업은 “북조선을 통일된 민주주의적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강력한 민주기지로 전변시키는 일”이라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공산주의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말하는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공산주의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말이다.


김일성 스탈린
평양에서 열린 광복 3주년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이 연설하고 있다. 뒤에 그려진 인물은 스탈린과 김일성
◇386 그룹 80년대 운동이념, 스탈린제 ‘민주 기지론’

따라서 ‘민주기지 구축’은 ‘공산기지 구축’이란 뜻이다. 즉 ‘북한을 민주기지로 삼는다’는 것은 ‘북한을 한반도의 공산통일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선 한반도를 통일보다는 분단된 상태로 그냥 두고 우선 북한을 먼저 튼튼한 공산기지 교두보로 만든 다음, 다음에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전략이다.

지금 현실정치권에 이미 진입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386그룹의 학생운동 시절 이념이 바로 이 ‘민주기지론’이었다. 이미 민주기지로 만들어져 있는 북한을 기지로 삼아 남한을 해방시킨다는 논리였다.

해방 전후사에서 스탈린과 그의 꼭두각시 김일성은 ‘선 분단 후 남한 병탄통일’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단독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평양으로 왔을 때 철저히 이런 사실을 숨겼다. 안타깝게도 김구 선생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이런 비밀 전략을 알아차릴 만한 안목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후 대한민국보다 25일 늦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면서 분단 책임을 남한 쪽에 돌렸다.

1945년 9월 20일에 스탈린이 암호지령문으로 ‘북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북조선에 진주한 소련군과 김일성에게 지시했다는 것은 소련 비밀문서 해제를 통해 사실로 밝혀진 사안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국내 일반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국내 역사학계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민중사학계 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도 아닌 ‘이승만 분단 책임론’을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지금 여야와 역사학계 간에는 초중고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일원화할 것인가, 아니면 현행처럼 복수의 검인정 교과서로 할 것인지를 놓고 첨예한 논쟁이 일고 있다.

이 교과서 논쟁에 한 가운데에 바로 단독정부 책임론, 6?25전쟁 책임론이 도사리고 있다. 앞서 말한대로 국내 역사학계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그룹이 민중사관론자들이다. 이들이 검인정 교과서의 대부분을 집필하고 있다. 이들은 소련 외교문서로 드러난 △스탈린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지령, △김일성과 스탈린의 6·25전쟁 도발 등을 외면하고 있다.

소련 문서를 통한 분단고착화과정
◇검인정 역사교과서 주도한 민중사학계, 국정교과서 거부

이 민중사학자들이 쓴 검인정 역사 교과서를 보면 북한이 단독 정부를 먼저 수립했다는 서술이 거의 없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도발했다고 쓰지 않고 남북 공동의 책임인양 애매하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이승만 분단 책임론’을 줄기차게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교과서 논쟁의 본질은 국정 교과서인가 검인정 교과서인가의 논쟁이 아니라 어떤 역사관으로 역사를 서술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국정교과서를 주장하는 그룹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만년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건설된 근대 국민국가인 대한민국과 이 국가에서 형성된 자유로운 ‘개인’과 ‘시민’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검인정 교과서를 주장하는 그룹은 이승만에게 분단 책임이 있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불의가 정의를 이긴 역사라고 인식하고 있다.

국정교과서·검인정 교과서 논쟁에는 이처럼 역사관 대립이 숨어 있다. 문제는 이런 역사관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겉껍데기로만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점이다. 본지가 ‘김일성 바로 알기’ 시리즈를 계속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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