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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러나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후에는 대만에 그대로 남았다. 이후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총통에 대한 암살 계획을 모의했다. 이로 인해 1952년 일본으로 피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일본에서는 도쿄(東京) 이케부쿠로(池袋)에 신전웨이(新珍味)라는 중국 음식점을 열어 운영하기도 했다. 이 식당은 훗날 일본 내 대만 독립 운동의 기지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대만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틈틈이 역사 연구에도 전념, 1962년 자신의 불후 명저인 ‘대만인400년사’이라는 대만 통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은 곧 대만 독립을 열망하는 지식인들에게 거의 성경과 같은 필독서가 됐다. 그가 대만 국민당의 눈엣가시가 된 것은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그의 일본 망명 생활은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정부 시절인 1993년 계엄령이 풀리면서 막을 내렸다. 8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귀환한 그는 이후에도 계속 노구를 이끌고 대만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2014년에는 대만 독립을 촉구하는 ‘해바라기 학생운동’ 등을 지원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는 독립 성향의 민주진보당 출신의 차이잉원(蔡英文·63) 총통과는 이념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2016년 차이 총통 정부가 출범할 때는 총통부의 자정(資政·고문)을 맡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차이 총통 역시 최근까지 틈만 나면 그를 문병하기도 했다. 이념적으로는 거의 부녀 관계였다고 해도 좋았다. 그가 사망 직전까지 “대만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차이 총통의 재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차이 총통의 승리를 기원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