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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 조은산이 말한다] 흙수저를 위하여

[진인 조은산이 말한다] 흙수저를 위하여

기사승인 2021. 10. 3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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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이른바 ‘수저계급론’에서 유래한 이 말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그들의 부모가 물려준 수저를 입에 물게 되고, 그 수저의 색깔에 따라 인생이 결론짓게 된다는 꽤 슬픈 현실을 전한다.

사실 힘든 현실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각자의 길을 걸어온 그들 앞에 이 사회는 그리 많은 것을 내어주지 않는다.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물가는 점점 오른다. 그리 많이도 올랐다는 최저시급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누리고 있고 내가 낄 자리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듯하다. SNS를 통해 보게 되는 건 온통 잘생기고 잘빠진 미남 미녀들의 독일제 세단 핸들 로고와 은근슬쩍 뒤로 자리 잡은 명품백의 브랜드 문양뿐, 가난과 고통의 피드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려 뉴스를 살펴보지만, 이제는 건강마저 상할 듯하다. 말도 안 되는 지경까지 치솟은 집값과 여야 간 대립각을 세울 뿐 해결 의지를 져버린 듯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암세포가 송골송골 맺히는 듯 명치 끝이 아려온다. 주식? 사자마자 파란 불이다. 상한가를 친 건 혈압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자문하지만 자답은 없다. 타인의 답변을 구해보지만, 주변에는 온통 나와 비슷한 처지의 흙수저들뿐이며 ‘라떼는 말이야’로 운을 먼저 떼기 시작하는 꼰대들로 점철된 세상이다. 과연 누가 나를 구해줄 것인가. 자본주의의 룰에 밝은 위로 팔이 장사꾼들이 정치권과 유튜브에 즐비할 뿐, 구세주는 없다. 기억하는 것은 ‘힘들 땐 쉬어가도 돼’라는 포근한 말들 뿐, 차갑고 딱딱한 방바닥 인생에 위로가 전해준 온기는 길게 가지 않는다.

TV 속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다. 재치 있는 말솜씨와 감정 충만한 화법으로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어느 입담가의 토크 콘서트에서 20대 백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청년이 이런 하소연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취업도 안 하고 놀고 있는 자신이 죄인같이 느껴진다며 조언을 구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자 그 입담가는 이렇게 답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쓸모없는 사람이냐며, 그냥 그렇게 있어도 좋다고 말이다. 그리고 재치 있는 애드립과 청년들이 취업하기 힘든 현실을 만든 정치인 탓을 곁들인 그가 좌중의 호응을 끌어내자 그 청년은 큰 위안을 얻었는지 결국 그 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쓸모없는 게 맞다. 또한 본인 스스로 그걸 아니까 얘기한 거다. 그리고 그 입담가는 토크 콘서트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음으로써 더 많은 삶의 기회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그 청년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그는 위안과 격려만을 얻었을 뿐, 도대체 무엇을 해결하고 집으로 되돌아간 것인가?

부동산 카페에서 명성을 얻은 어느 논객이 그의 저서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을 가름하는 건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 시작한다고. 그리고 부동산을 예로 들었는데, 이제 막 사회에 눈을 뜬 누군가가 집값 폭락론자의 방송을 처음 보게 되는 것과 혹은 자가 소유론자의 방송을 보게 되는 것에서 인생의 길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말은 결국 틀리지 않았다. 집값 폭락론자의 달콤한 말에 위안을 얻은 무주택자는 벼락 거지가 된 반면에, 영끌을 감행해 집을 산 사람은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삶을 책임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현실을 판 게 아니라 위로를 팔았기 때문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한때 옥탑방에 기어 올라가 서민의 고통을 나누겠다며 한 달간 쇼를 벌인 전임 서울시장을 기억한다. 내가 알기로 현 부동산 대란의 원인은 절반이 그의 몫이다. 서울 시내에 예정된 400여 곳의 재개발을 무더기로 취소시킴으로써 공급 절벽 사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쇼를 통해 잠재 고객이었던 서민들에게 위로를 팔았을 뿐, 다가올 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 대가를 정작 흙수저들이 치르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온갖 위로가 판을 친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재정건전성을 논하며 반론을 펼치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포퓰리즘의 양상은 감성적 위로가 이론과 실제를 압도한다는 점에 있다. 자신을 흙수저라 칭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잠시 위로를 거부하고 아픈 현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서민을 앞세워 표 벌이에 나선 정치인을 위해 평생 서민으로, 흙수저로 살 이유는 없다. 우리는 공감보다 해결을 원한다. 이제 누굴 뽑아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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