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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주유소 습격 사건

[칼럼]주유소 습격 사건

기사승인 2022. 10. 1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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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극장에 앉아, 보는 내내 결말이 몹시도 궁금한 영화가 있다. 그런 경우 작품성에 상관없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게다가 영화가 끝난 이후의 상황이 더욱 궁금해진다면, 그 작품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주유소 습격 사건'이 바로 그랬다.

학생들과 함께 김상진 감독의 1999년 작 '주유소 습격 사건'을 선정해 세미나를 했다. 다시 보니, 옛날 영화답게 플롯은 거칠고 연기는 어딘지 연극적인 것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학생들은 재미있게 본 모양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IMF 시기 서울의 모습과 사람들이 흥미로운 듯 했다. 아무래도 세미나의 취지가 영화를 만들었을 당시의 영상 인류학적인 코드를 찾는 것이었으니 그도 그럴만하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청춘들은 이 영화에서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우선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집단극의 형식이라 개봉 당시 신인배우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초호화캐스팅이다. 주·조연은 물론 단역까지도 현재 유명한 주연급 배우들의 데뷔 때 모습을 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영화의 오프닝, 다짜고짜 네 명의 악당들이 등장해 주유소를 습격한다. 닥치는 대로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부린다. 한 번에 족하지 않은지 두 번에 걸쳐 주유소를 턴다. 금고에 충분한 현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사장과 알바생들을 가둔 채, 악당들은 직접 기름을 판다. 주유하기 위해 들어오는 차량의 운전자들에게 무조건 만땅(?)을 강매한다. 자신들의 맘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인신을 구속하고 린치를 가한다.

그러다가 주유소에 들른 동네 양아치들과 엮이고, 그들과 연계된 조폭들까지 개입하게 된다. 그 와중에 순찰차가 다녀가고, 야식을 배달한 중국집 배달원이 폭행당하자, 자신의 무리를 데려와 주유소를 장악한 악당들을 습격한다. 습격에 습격이 가하자 난장판이 되고, 이제 주유소는 그야말로 무법 자체인 아수라장이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들이 현장에 끼어든 가운데, 무리 중 한 명이 라이터를 켜 든다. 다 같이 죽자고 덤비는 상황에서, 이제 모두가 라이터를 켜고 대치한 채 서로서로 위협한다. 영화가 끝났지만, 그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주유소는 흥미로운 장소다. 먼저 산업화의 주요 동력인 기름을 다루고, 그것을 독점해 판매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본주의적인 공간이라는 함의가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유소의 이름조차 '오일뱅크'다. 한편 자원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고 사회가 불안할 때, 주유소는 먼저 약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화약고와 같다. 분배의 문제라는 사회적 모순을, 정치를 통해 풀어내지 못할 때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유소는 매우 상징적이다. 자원과 물자가 과잉되어 넘쳐나도, 정반대로 절대적으로 부족해도 위태위태한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협의와 합의를 통한 민주적인 절차의 정치제도가 절대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체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주유소 바닥에 휘발유가 잔뜩 흩뿌려져 있고 수십 명의 무리가 라이터를 켜 든 상태에서, 이 사달을 일으킨 네 명의 악당들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가면서 막이 내린다. 여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그곳에 남아있던 이러저러한 등장인물들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과연 목숨을 부지했을까 싶다. 아니 영화 속 주유소 사장의 대사처럼 폭발로 동네가 날아갔을 것이다. 모두가 공멸한 채 말이다.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청춘들은 영화의 장면들 속에서, 어떤 소수의 무리가 거짓말로 대중을 오도하고, 정치를 협의가 아닌 정쟁으로 이끌며, 사건을 사건으로 덮어 여론을 흐리고 정작 자신들은 그 혼란 상황을 이용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을 엿본 듯싶다. 영화 속 악당 중 한 명의 대사처럼 "난 한 놈만 패"라며 대중들에게 본보기로 삼아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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