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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中 전 주석은 3세대 지도자로 상하이방 맹주

장쩌민 中 전 주석은 3세대 지도자로 상하이방 맹주

기사승인 2022. 11. 3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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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사태 수혜자라는 사실은 두고두고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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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8월 8일 허베이(河北)성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당시 미 하원 외교관계위원장이던 조 바이던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장쩌민 전 중국 주석. 30일 병환으로 96세를 일기로 상하이에서 타계했다./제공=신화(新華)통신.
30일 타계한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의 뒤를 이었던 중국 제3세대 최고 지도자로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시 출신의 정치 파벌)의 맹주로도 유명했다. 때문에 2002년 은퇴 이후 타계하기 직전까지 막후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1926년 8월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시에서 현지의 금수저 출신인 장스쥔(江世俊)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들이 없었던 숙부 장상칭(江上靑)의 양자로 보내져 줄곧 작은집에서 자랐다. 이후 상하이의 명문 자오퉁(交通)대학 전자기계과에 입학, 1947년 졸업했다.

공산당에는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6년 입당, 본격적으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졸업한 다음에는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1955년 구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의 스탈린자동차공장에서 1년 동안 유학하기도 했다. 이후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의 제1자동차 공장 엔지니어를 거쳐 국무원 기계공업부와 전자공업부 부장을 역임했다.

그 역시 다른 최고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1966년 막을 올린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무진 고생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상하이 소재 제1기계공업부 전자기기연구소에서 부소장으로 재임하고 있었으나 곧 당과 공직에서 쫓겨났다. 10년 동안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운명 역시 피하지 못했다.

다행히 문혁이 종료된 다음에는 억울하게 박해를 받은 사실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1985년에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에서 시장으로 발탁되면서 미래의 지도자 자리도 예약했다. 기회는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유혈 참가가 끝난 직후 극적으로 찾아왔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정부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그를 덩샤오핑이 후계자로 낙점한 것이다.

13년 동안이나 최고 지도자로 재임한 만큼 그는 공도 많았다. 개혁, 개방의 지속 추진과 시장경제의 발전을 통해 경제 성장률을 연평균 9.3%로 견인한 성과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를 비교적 원만하게 이끌어온 것도 나름 평가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과(過)도 적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역시 톈안먼 사태 무력 진압에 적극 관여한 사실이 아닌가 보인다. 여기에 집권 시절인 1999년 파룬궁(法輪功) 탄압에 앞장선 것도 그에게는 주홍글씨로 남아 있다고 해야 한다.

직계 가족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엄청난 축재도 저승의 그에게는 두고두고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손자인 장즈청(江志成·36)이 사모펀드 보위(博裕)캐피탈의 실질적 오너로 있으면서 최소 수백억 위안(元·수조 원)의 재산을 보유 중인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을 비교적 잘 이끈 최고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는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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