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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39> 정치 풍자의 변주곡(1) ‘비 내리는 호남선’

[대중가요의 아리랑] <39> 정치 풍자의 변주곡(1) ‘비 내리는 호남선’

기사승인 2023. 05. 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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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이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정치 풍자가요가 된 '비 내리는 호남선' 열풍은 1950년대 한국 사회와 대중음악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호남선에 비가 내린다'는 것은 호남의 한(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호남 쪽에서 유독 이별과 설움의 노래가 많은 까닭이기도 하다. '목포의 눈물'이 그랬고 '대전 블루스'가 그렇다. 이 같은 정서는 1970년대 이후 정치적인 핍박과 경제적인 소외와 더불어 심화되었다. 경부선 주변에는 공단이 조성되고 도시가 성장한 데 반해 다도해를 낀 호남선 주위는 어둡고 고단한 사람들의 좌절과 한숨이 누적되었다.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호남 출신인 김대중 대통령 시대가 출현하기 전까지 적잖은 세월 동안 호남선에는 눈물과 탄식이 스며있었다. 그래서 경부선보다는 호남선에 내리는 비가 가슴에 와닿았던 것이다. 시대의 거울인 대중가요가 그것을 간과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손인호가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은 영호남 지역 감정과 차별론이 표면화되기 전인 1956년 자유당 정권 시절에 나온 노래이다.

그런데 호남선의 특유의 비감과 애수가 공교롭게도 당시의 정치 지형도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제3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 나선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투표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하필이면 호남선 열차에서 뇌일혈로 서거한 것이었다. 하루 전에만 해도 한강 백사장에 30만명의 기록적인 인파를 불러모으며 이승만 자유당 독재를 물리칠 유일한 희망으로 부상했던 야당 후보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때마침 나온 '호남선'이 제목으로 들어간 가요의 노랫말 중 '목이 메인 이별가' '돌아서서 이 눈물을' '속는 줄을 알면서도' 등은 울분과 허무와 의혹의 늪에 빠진 국민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노래는 애절한 가락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어느새 '신익희 추모곡'으로 바뀌었다. '신익희 선생의 부인이 노랫말을 지었다'는 풍문까지 나돌면서 경찰은 야당이 의도적으로 국민정서를 자극한다고 조사에 나섰다.

작곡가 박춘석과 작사가 손로원을 소환해 노래의 제작 의도를 캐물었고 가수 손인호까지 불러 '어떤 감정으로 노래를 했는지' 취조를 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노래가 그 전해에 만들어졌으며 음반도 선거 3개월 전에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이들을 풀어줬다. 노래는 정치적인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탄생했지만, 정치적인 의구심과 허탈감을 달래야 했던 대중의 심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것이다.

신예 작곡가 박춘석이 목포 공연을 위해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차창밖에 구슬프게 흩날리는 보슬비를 보며 악상이 떠올랐다. 호남의 감성과 이별을 담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멜로디를 받아든 손로원이 곡진한 내용의 가사를 채웠고 정감 있는 손인호의 목소리를 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치적 격랑 속에 출렁이던 민심이 애틋한 노랫말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국민가요가 되어버렸다.

'비 내리는 호남선'은 자유당 정권하의 험난한 시대상과 대중의 정치적 한을 싣고 한 시절을 풍미했다. '목포의 눈물'이 식민지 시대 민족의 비애를 노래했다면 '비 내리는 호남선'은 해방된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민중가요였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대중음악이 스스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정치적 감수성의 그릇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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