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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40> 운명이 되어버린 노래 ‘산장의 여인’

[대중가요의 아리랑] <40> 운명이 되어버린 노래 ‘산장의 여인’

기사승인 2023. 05. 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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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전주곡의 뻐꾸기 울음 소리가 산장의 적막한 분위기를 더하는 대중가요 '산장의 여인'은 경남 마산병원의 산장병동을 무대로 탄생했다. 당시로서는 불치의 병이었던 결핵에 걸린 어느 미려한 여인의 고독하고 애잔한 삶이 노래의 모티브가 되었다. 노래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작사가 반야월이 6·25 전쟁 당시 고향인 마산으로 피란을 와서 마산방송국 문예부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서울에서 온 가요인들로 구성한 '방송국 위문단'과 함께 마산 결핵병원으로 위문 공연을 갔다. 그런데 객석 맨 뒤쪽에 환자복을 입고 앉아 있던 창백한 여인이 계속 흐느껴 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연 후 직원들에게 사연을 물어보니 폐결핵 환자로 건너편 산장병동에 요양 중이라고 했다. 노랫말 그대로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외롭게 살아가는 미모의 여인이 음악적 감성을 자극한 것이었다.

반야월은 여인의 안타까운 처지를 가사로 완성하고 마침 마산병원 입원 경험이 있는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겨 곡을 붙였다. 노래는 KBS 중앙방송국의 전속 가수로 있던 권혜경이 불렀다. 1957년 음반이 나오자 '산장의 여인'은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특히 삶이 고독한 여인들이나 유흥업소 여성들이 자신에게 드리운 어둡고 고달픈 운명의 그림자를 탄식하는 카타르시스로 여겼다.

옛 시인들은 우연히 지은 시가 훗날의 현실과 꼭 들어맞았을 때 이를 돌이켜 보며 시참(詩讖)이라고 했다. 시적 예언이란 뜻이다. 가수들도 자신이 부른 노래의 가사처럼 되는 경우가 적잖다. 윤심덕(사의 찬미)과 이난영(목포의 눈물)의 삶이 그랬다. '마지막 잎새'를 부른 배호와 '서른 즈음에'를 부른 김광석도 노랫말이 시사하듯 요절했다. '산장의 여인'을 부른 권혜경은 정말 '산장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는 은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던 이력의 충동으로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속 가수가 되었다. '산장의 여인'으로 스타가 되면서 당대의 가요인들과 드라마 주제가 '호반의 벤치',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 등을 취입했다. 엘리트 의식이 강해서 노래의 창법 또한 기존의 트로트와는 다른 클래식 성음을 선호했다.

인기의 가도를 달리던 1959년 나이 스물여덟에 심장판막증이 찾아왔다. 투병 중에도 음반 취입과 공연 활동을 눈물겹게 이어가던 그녀에게 후두암 선고에다 몇몇 질병까지 겹치는 더 큰 시련이 닥쳤다. 기적적인 소생과 재발을 반복하며 가사의 마지막 소절처럼 '홀로 재생의 길을 찾아'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여생 수십 년간 전국의 교도소와 소년원을 순회하며 400여 차례의 공연과 강연을 펼쳤다.

대중음악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박성서는 권혜경이 타계하기 몇 해 전 충북 청원에 있던 산장을 찾은 적이 있다고 했다. 산마을 끝자락에 오래 머물던 노가수의 모습은 백발에 주름이 가득했고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산장 앞마당에 조그맣게 판 구덩이에 묻히고 그곳에 노래비가 세워지기를 소망했다는 그녀는 200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노랫말처럼 살다가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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