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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41> 월남민의 망향가 ‘한 많은 대동강’

[대중가요의 아리랑] <41> 월남민의 망향가 ‘한 많은 대동강’

기사승인 2023. 05.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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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때까지/ 아~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대동강 부벽루야 뱃노래가 그립구나/ 귀에 익은 수심가를 다시 한번 불러본다/ 편지 한 장 전할 길이 이다지도 없을쏘냐/ 아~ 썼다가 찢어버린 한 많은 대동강아' 손인호의 정감 있는 목소리에 실린 이 노래 가사에는 대동강의 정경이 애틋하다.

대중가요평론가 유차영은 "'한 많은 대동강'은 1920년대 후반 우리 대중가요의 사립문 노래라고 할 수 있는 '황성옛터'와 음유(吟遊)의 끈이 닿아 있다"고 했다. 그렇다. '황성옛터'가 폐허로 변한 고려 왕궁터를 돌아보며 일제강점기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면, '한 많은 대동강'은 분단으로 잃어버린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그 대상이 모두 북한에 있으며 기억 속의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작곡가 한복남, 작사가 야인초, 가수 손인호 모두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이라는 것도 노래가 지닌 망향의 정서를 더한다. 대동강은 평양의 젖줄이자 북한의 명소이다. 북에서 월남한 피란민들에게는 고향의 대명사이자 향수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그래서 북녘을 향한 망향의 노래에서 대동강이 빠질 수 없는 것이다. 하긴 대동강은 멀리 고려시대부터 이별의 노래인 별곡(別曲)의 중심이었다.

별리(別離)의 서정과 임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토로한 고려가요 서경별곡(西京別曲)의 무대가 대동강이었다. 고려시대 문신 정지상이 지은 이별시의 절창 송인(送人)의 배경 또한 대동강이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비갠 언덕에 풀빛이 짙은데, 남포로 님을 보내는 슬픈 노래가 이는구나,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를 것인고,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보태는 것을).

북녘에서 내려온 실향민의 아픔을 그린 '한 많은 대동강'은 한복남이 작곡을 해놓고 손인호가 꼭 불러야 한다며 3년을 기다리다가 1958년 발표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아시스레코드 전속을 끝내고 도미도레코드로 옮긴 뒤 첫 취입곡이 되었다. '한 많은 대동강'은 2018년 4월 남한예술단 평양공연에 참가한 실향민 송해가 그렇게 부르고 싶어 했지만 북한 당국의 제재를 당했던 노래이기도 하다.

1954년 박시춘이 작곡한 '나는 울었네'를 취입해 존재감을 드러낸 손인호는 4년 뒤 정치 풍자가요로 확산된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불렀다가 경찰 조사까지 받는 곤욕을 치렀다.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유세 중이던 민주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하자 울분과 좌절에 빠진 국민들이 '비 내리는 호남선'을 '해공 추모가'로 애창한 것이다. 덕분에 노래는 대히트를 하게 되었다.

미남(美男)에다 미성(美聲)의 예인이었던 손인호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1950·1960년대를 풍미한 숱한 노래들을 유행시키면서 10여 년간 가요계의 정상에 있는 동안에도 공개적인 무대에는 전혀 나서지 않았다. 대중은 그런 손인호의 태도에 신비스러운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손인호는 2001년 6월 KBS 가요무대에 75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내 주목을 끌었다.

많은 히트곡을 가진 가수였던 손인호의 본 직업은 영화 녹음기사였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당대의 이름난 영화들이 모두 손인호의 손을 거쳤던 것이다. 그 같은 공로로 대종상영화제에서 녹음상을 7차례나 받기도 했다. 음악평론가 박성서는 그를 "라디오와 영화가 국민들에게 최고의 오락수단이었던 시절, 두 무대를 모두 장악한 '소리의 마술사'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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