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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헨리 키신저 박사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특별기고] 헨리 키신저 박사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기사승인 2023. 05. 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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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헨리 키신저

2023년 5월 27일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박사는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 그는 미국에서 이민자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정치적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의 신화적 인물이다. 미국의 헌법에 미국 출생자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없었더라면 그가 대통령직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당시 키신저의 대통령직 출마를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그런 제안이 의회에서 정식으로 발의되지는 않았다. 학자-외교관(scholar-diplomat) 헨리 키신저는 마치 20세기의 경이로운 마법사처럼 자신의 엄청난 지적 자산을 사용하여 20세기 후반 국제정치의 평화를 위한 구조적 질서를 구축했다. 당시에 그의 현란한 외교활동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비판자들은 키신저를 외교의 마법사(magician)가 아니라 외교적으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일개 곡예사(acrobat)로 폄하하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는 민주국가들이 가장 중대한 위험을 직면했던 1930년대를 독일에서 경험했고 미국이 인류의 희망을 구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수십 년 동안 그 사명에 동참했다. 즉 그는 파시즘을 파괴하고 적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건설된 신군사제도들을 실천한 개척자적 세대의 일원이었다. 그는 전후 도전들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학문적 계획의 수혜자였으며, 지구적 대전략을 수립하는 새 전문가 세계의 일원이었으며, 그리고 냉전을 수행할 권력이 부여된 정책결정기구들에 속했다. 미국 국력의 성장은 광범위한 미국의 행위자들 사이에 영향력의 분배를 의미했다. 키신저는 새로운 힘의 중심지들을 통해 활동하면서 미국의 세기에 기여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산물이었고, 키신저 자신의 표현대로, '미국의 세기의 자식(a child of the American Century)'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20세기는 또한 '헨리 키신저의 세기'였다. 나폴레옹을 마무리한 후 19세기 전반기 동안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Metternich) 수상이 당시 최초의 '유럽의 수상(The Prime Minister of Europe)'이라고 불리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20세기 중반기 세계적 긴장완화(detente)를 추진했던 키신저의 마법사 같은 국제정치의 관리와 외교력으로 인해 당시에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가 '미국외교정책의 대통령', 혹은 더 나아가서, '지구의 대통령(the President of the planet earth)'이라고 칭송되었던 것이 결코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다. 

키신저는 미국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역사상 수많은 국무장관들 중 제56대 국무장관이었다. 그는 미국 행정부의 권력구조에서 제2인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외교적 마법'을 사용하여 한때나마 '지구의 대통령'으로까지 칭송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 키신저의 '군주'였던 제37대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신임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한 후 외교정책의 문외한인 제38대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대통령의 전폭적 신임의 덕택이었을까? 그에겐 분명히 그런 행운의 요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의 대부분이 그의 탁월한, 창조적 리더십의 결과라고 보아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헨리 키신저는 1938년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온 뒤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지아이 빌(GI Bill) 덕택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탁월한 학문적 재능으로 필적할 수 없는 지적 자본을 축적했고, 또 그곳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정치적 야심에도 불구하고 케네디와 존슨의 행정부 시기에 그는 계속 권력의 외부인으로만 머물다가 1969년 마침내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되어 비로소 권력의 내부인이 되었다. 바로 그때부터 키신저는 마치 경이로운 마법사처럼 당시 치열한 미-소 초강대국들의 정면 대결로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던 냉전시대에 사반세기 만에 죽의 장막을 뚫고 미-중의 관계개선을 이루고, 소련 제국의 철의 장막을 넘어 미-소 간의 데탕트를 구축하여 국제적 3각(tripolar)체제, 즉, 보다 안정적인 정치·외교적으로 다극적(multipolar)인 새 국제체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미국을 기나긴 베트남 전쟁의 질곡에서 마침내 탈출을 시켰다. 

그는 또한 당시 전쟁 중인 중동과 내전 중이거나 내전의 발발이 위협하고 있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창조적인 왕복외교(shuttle diplomacy)를 통해 마치 현란한 곡예사처럼 중동에서 소련을 추방해 버렸고,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검은 아프리카에서 다수인 흑인통치의 원칙을 채택하고 그것의 구현을 위한 시도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미국을 경계하고 심지어 적대적이었던 검은 대륙의 국가들이 미국을 다수인 흑인들의 통치를 위한 세력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주어진 비교적 짧은 기간에 모두 이루었다는 것은 20세기 후반 드라마같은 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세계사적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헨리 키신저는 그의 탁월한 지성과 놀라운 재능으로 20세기 후반에 경이로운 마법사이며 동시에 현란한 곡예사 같은 역사의 창조자였다. 

헨리 키신저는 스스로 칸트주의자(Kantian)였다고 말한다. 그에겐 분명히 칸트적인 지성적 요소가 많이 있다. 그것은 순수이성 비판에서 볼 수 있는 세계관의 관점에서 본다면 키신저는 필연의 세계관이 아니라 인간은 궁극적으로 행동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고 그래서 자유를 행사하는 존재라는 인식론적(epistemological)인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식론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본질에 관해서, 즉 존재론적(ontological)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인생관의 본질은 권력의 욕구에 의해서 비밀리에 사로잡힌 니체주의자(Nietzschean)였다. 그리고 그는 외교 전략가로서 20세기의 비스마르크였다.

키신저는 1981년 공직에서 물러난 뒤 대학교수로 돌아가지 않고 빈번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리고 줄기찬 저술활동을 통해 미국인들을 교육하는 '국민의 교사'가 되었다. 그가 2022년 99세의 나이에 출간한 <리더십: 세계전략의 6개 연구>(Leadership: Six Studies in World Strategy)에서 리더십의 시험은 분석능력, 전략, 용기, 그리고 인격의 4가지 덕목을 서술했다. 그리고 그가 만난 6인의 동시대 지도자들에 대한 연구에서 통치의 전략으로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겸손의 전략',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은 '의지의 전략',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균형의 전략',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는 '초월의 전략', 리관유(Lee Kuan Yew)는 '탁월성의 전략', 그리고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는 '신념의 전략'으로 특징 지었다. 여기에 우리는 헨리 키신저 자신은 넘치는 '지성의 전략'이라고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1972년 5월 모스크바에서의 성공적인 정상회담은 키신저를 지구적 수퍼스타로, 미디아 시대의 첫, 그리고 유일한 '명사 외교관'으로 변환을 완성했다. 그가 당시에 받고 있던 대중적 추종의 유형은 <시카고 선-타임즈>(Chicago Sun-Times)가 정상회담 직후 낸 전문에 반영되었다: "헨리 키신저는 하나의 현상이기를 멈추었다. 그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변함없이 전설이었다.

강성학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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