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70년대 민주화·유신 붕괴가 주는 배움은” 윤보선민주연구원 세미나 개최

“70년대 민주화·유신 붕괴가 주는 배움은” 윤보선민주연구원 세미나 개최

기사승인 2023. 06. 09. 20:23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주최
9일 프레스센터 19층서 개최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유신체제의 붕괴 집중 조명
KakaoTalk_20230609_201609572_01
김용호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원장(오른쪽으로부터 네번째)과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왼쪽으로부터 다섯번째) 등 참석자들이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23년도 전기 학술회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 박지은 기자 @pje00516
윤보선 대통령과 영부인 공덕귀 여사가 이끌었던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윤보선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후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면서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됐지만, 군사정부 연장 반대운동에 앞장 섰다. 1963년과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패하기도 했다. 1970년대는 윤보선 대통령과 공덕귀 여사가 재야의 민주화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이끌었던 시기다. 윤보선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990년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와 2023년 현재
김용호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원장은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 유신체제의 붕괴'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개회사에서 "최근 국내 정치상황은 지역·세대·이념·젠더 갈등이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이런 시기에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은 1970년대 정치·경제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함"이라고 운을 뗐다.

이번 세미나는 2020년과 2021년에 이어 세 번째다. 김 원장은 "1970년대에는 유신(維新)이 있었고 지금은 민주화가 진전된 시기라 서로 비교하는 것이 어려운 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를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김 원장은 "1978년 국회의원 선거(총선)는 유신시대 조기 붕괴의 계기가 됐다"며 "내년 총선은 어떠한 정치적 변동을 가져올 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19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시도는 한미 관계를 어렵게 했는데, 최근 북핵 위협이 고조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핵 무장론이 나오고 있다. 우리들은 과연 1970년대의 핵개발 시도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다.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의 행보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김 원장은 "공덕귀 여사는 민주화 운동, 여성·인권 운동과 선교 활동 등 여러 사회 운동을 전개하셨다"며 "여사님의 이런 노력이 유신 체제 조기 붕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지난해 공덕귀 여사 평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김정남 전 수석비서관이 기억하는 윤보선 대통령과 공덕귀 여사
개회사 두 번째 순서는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의 회고였다. 김 전 수석비서관은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에서 근무했으며,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그는 "종로경찰서 앞 길을 지나서, 빤히 내다보이는 그 길을 가는데 그렇게 무서웠다"며 1970년대를 떠올렸다. 종로에 있던 윤보선 대통령의 집을 찾을 때면 "지나가는 것처럼 하다가 몰래 빼꼼히 열어놓은 대문으로 뛰어들어가거나, 나올 땐 공덕귀 여사가 교회에 새벽 예배를 볼 때 따라나오곤 했다"고 전했다. 군사정권의 도청도 항상 두려워했다. 김 전 비서관은 "말씀을 하실 때 꼭 라디오를 켜놓으셨다. 정보정치가 무서워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게 들린다 해서 라디오 볼륨을 키우곤 했다"며 "1970년대는 야당보다 재야 쪽이 투쟁의 중심에 섰던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전 비서관은 재야의 투쟁 중심에 윤보선 대통령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끊임없이 윤 선생을 정점으로 국민회의, 민주주의·민족주의 통합 국민연합 등을 구축하려고 애를 썼다. 그때마다 깨지긴 했지만. 정치권으로 군사정권 투쟁이 넘어간 건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라는 단체를 상도동 중심으로, 동교동계를 끌어들여서 만들었을 때였다. 민주화 투쟁의 중심이 비로소 정치권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1980년대부터는 민주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썼다. 요이땅! 하고 누가 부르자고 그런 게 아닌데 그랬다."

윤보선 대통령과 공덕귀 여사가 군사정권의 대척점에 서 있던 이들을 조용히 도왔던 일도 전했다. 김 전 비서관은 "공덕귀 여사님이 어디다 호소할 곳 없는 인혁당 사람들의 가족들을 챙겨주셨다. 윤보선 선생은 김수환 추기경과 양대 축으로 인혁당 구명 운동에 주저함 없이 제일 먼저 서명해주기도 했다. 윤보선 선생은 모든 것을 '내가 할게, 다 가져와라' 이렇게 제일 먼저 서명하시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1978년 12월 12일 치른 국회의원 선거는 유신 체제 붕괴의 신호탄이 됐다. 당시 야당이 전체득표율에서 1.1% 앞서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1979년 5월 30일 전당대회에서 총재에 당선된 김영삼이 강경투쟁을 선언했고, 정권은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인터뷰에 사대주의가 반영됐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한다.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은 부마민중항쟁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김재규의 손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린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