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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영웅을 인정하지 않는 시종들(Valets)의 시대를 극복하자

[특별기고] 영웅을 인정하지 않는 시종들(Valets)의 시대를 극복하자

기사승인 2023. 09. 2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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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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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어느 누구도 자기의 시종에게는 영웅이 아니다." 이것은 프랑스 절대군주 루이 14세(Louis XIV)가 군림하던 시대에 마담 드 세비녜(Madam de Sevigne)가 맨 처음 했던 말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그 말은 하나의 경구 내지는 속담이 되었다. 헤겔이 이것을 "어느 누구도 자기의 시종에게는 영웅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시종은 시종이기 때문이라고" 확대했다. 이 속담의 이 수정본은 1807년 헤겔의 <정신현상학>(Phenomenology of Spirit)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후에 그의 <역사철학>(Philosophy of History)에서 반복되었다. 헤겔은 영웅들에게 전매특허 같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영웅들은 역사의 발전에 중대한 에이전트들인 "세계사적 개인들(world-historical individuals)"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시종의 영혼을 가진 소인배들을 경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적 개인들의 민감성과 의식을 자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17세기 영국의 급진적 수평파들(Levelers)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평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신들의 어떤 영웅들에 관해 아주 열정적일 필요 없이도 영웅과 시종 사이 헤겔의 구별을 이해할 수 있다. 헤겔 자신도 나폴레옹 같은 자기의 영웅들에게서 불멸성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세계사적 개인들은 자기들의 방해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사려 깊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에서 많은 죄 없는 꽃들을 짓밟았다. 이에 대해 그들은 참으로 도덕적 비난에 직면했다. 그들도 역시 위대한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떨어지는 불행에 직면했다. 그들은 알렉산더처럼 젊어서 죽거나, 시저처럼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나폴레옹처럼 유배지에서 그들의 삶을 마감했다. 그들은 실제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이 위대하고 초월적인 것에 분개하고 그것을 오직 무시하고 비판하는 소인배들, 즉, 시기하는 인간들에게는 약간의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헤겔의 말처럼 그의 영웅인 세계사적 개인들은 과거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약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국가가 수립되고 나면 영웅들이 더 이상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웅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조건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헤겔은 가장 근대적이고 문명화된 국가들에서 영웅의 발견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카알라일(Carlyle)도 영웅을 칭송했다. 그는 신, 예언자, 성직자, 왕, 시인 그리고 문학가 같은 다양한 영웅들을 논했다. 그도 헤겔처럼 아무도 자기의 시종에게는 영웅이 아니라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만일 시종이 영웅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종이 빈약한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위대성의 아이디어를 참을 수 없는 시종은 영웅을 자기의 크기로 잘라버릴 수 있을 뿐이다. 카알라일의 영웅은 성자가 아니라 그의 개인적 결함이 무엇이든 그의 위대성과 지혜로 존경받는 영웅이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신(新)역사"(New History)가 ("오늘날 역사학이 왜 정치교육에서 무익한가?" 아시아투데이, 2023년 2월 16일자 필자의 칼럼 참조) 나폴레옹과 같은 세계사적 개인들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엘리트 인물들도 역사에서 추방했다. 여기서 엘리트 인물들이란 왕들뿐만 아니라 대통령들, 그리고 귀족들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더구나 폄하되고 대체되는 것은 엘리트 개인들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들이 필연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또 위대한 아이디어와 고전들이 위대한 정신의 산물인 역사에서 위대한 사건들인 엘리트의 주제가 폄하되고 대치된다. 역사학자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일상적 삶의 평범한 관심을 넘어서는 아이디어, 동기, 그리고 이익을 부인할 때 이런 "아래로부터의 역사", 즉 민중사관은 그 자체가 거들먹거린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역사에서 영웅적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시종의 수준으로 추락된 역사가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어떤 측면도 부인당해 시종 수준으로 떨어진 인민들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말처럼, 그들은 우주적 의식과 단절되어 그들의 삶의 즉각적이고, 일상적이며, 특수한 환경을 넘어서게 하는 존재의 질서가 부인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시종 같은 개념의 문제점은 그것이 위대성과 영웅주의의 폄하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개성과 자유의 폄하인 데 있다. 거의 200년 전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바로 이 문제를 예상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제2권 제20장에서 "민주주의 세기에 역사가들에게 특이한 몇 가지 특징들"이라는 놀라울 정도의 선견지명을 보여주고 있다. 아주 간단한 이 장에서 토크빌은 구역사와 신역사 사이의 본질적인 구별을 이미 지적했다. 귀족주의 시대에 역사가는 발생한 모든 것을 특수한 인간들의 의지와 인격에 모든 것을 돌리면서 가벼운 사건들이 가장 큰 혁명들의 원인이라고 가정했다. 반면에 민주주의 시대에 역사가들은 인류의 운명에 대한 어떤 영향도 개인들에게 돌리지 않고 가장 작은 특수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원인들이 책임이 있게 만드는 성향이 있다. 민주적 양식의 위험은 역사를 만드는 데 있어서 개인들의 의지를 무시하는 역사가는 인간의 자유도 역시 무시한다는 것이다. 토크빌의 이 말은 마르크시즘의 경제적 결정론과 최근의 민중결정론을 포함하여 모든 결정론에 적용된다. 모든 결정론은 개인들의 의지, 아이디어, 행위, 그리고 자유를 무시하는 효과가 있다.

개인의 의지가 없다면 영웅도 없다. 그러나 개인들이 없다면 악당들도 없다. 악당의 부재는 영웅들의 부재처럼 영혼을 파괴한다. 시종에게 영웅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시종에게는 악당이 아니다. 시종에게 주인은 모두 같은 인간들이다. 주인의 신발을 벗기고 잠자리를 돕는 시종은 주인에 관해서 다른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종이 알지 못하는 것은 자기 주인이 영웅인지 악당인지의 여부이다. 즉, 그가 위대한 정치가인지 혹은 철학자인지, 아니면 그가 폭군인지 사기꾼인지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신봉하는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를 들어, 나치즘의 결정적인 사실들이 히틀러나 나치의 아이디어, 정책, 혹은 심지어 행동이 아니라 독일국가의 구조, 관료제도와 압력단체들의 성격, 경제의 긴급사태와 지리적 조건이다. 이런 구조주의적 분석의 효과는 토크빌이 예측했던 그대로다. 개인들, 아이디어들, 그리고 의지의 중요성을 평가절하 하여 히틀러와 나치 지도자들의 역할을 하찮게 만들어 그들의 정복과 대량살인의 이미 공언한 의도를 최소화하거나 심지어 부인하고 악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사회에서 자유의지의 행사를 제거하고 인간에게서 선과 악을 선택할 그들의 능력을 박탈했다.

동일한 분석이 스탈린 치하의 소련의 역사에도 적용되었다. 구조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를 하나의 전체주의의 형태, 즉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스탈린체제에 의해서 강요된 폭군체제로 보지 않는다. 소련의 전체주의와 테러에 관한 사실들을 결정적으로 기록한 소련 전문가 로버트 콩퀘스트(Robert Conquest)는 스탈린주의 없이 스탈린의 시대를 묘사하려는 이런 노력을 단지 덴마크의 왕자가 없는 <햄릿>일 뿐만 아니라 아무런 개성이 없는 햄릿 왕자에 등가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테러는 부수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스탈린정책의 핵심적 목표였다. 1945년 얄타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이 러시아의 수백만에 달하는 많은 자경농민들의 행방에 관해서 물었을 때 스탈린은 천연덕스럽게 그들은 그냥 사라졌다고만 대답했었다. 스탈린은 러시아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였다. 스탈린의 테러로 인해 수백만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스탈린은 살아남아서 사진촬영을 위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날 개인의 의지와 자유가 없이는 미덕과 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다. 미덕과 악이 없다면 영웅들과 악당들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선하든 악하든 어떤 영웅도 알아보지 못하는 시종들만 있는 세상일 것이다. 만일 그런 시종의 사고방식이 전 국민들을 지배한다면 우리들 가운데 가장 초라하고 또 가장 탁월한 사람들 모두가 시종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 가운데 거인은 없고 오직 난쟁이들만 가득할 것이다. 영웅이 없는 나라는 망하거나 영원히 비굴한 소인국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간의 정신 속에는 그런 실추를 오랫동안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에서 폭정의 타도를 목격한 우리는 그런 사건들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이 고양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북한의 폭정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개개인의 자유와 의지를 고양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토크빌(Tocqueville)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자유의지가 희미해지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종처럼 인간 영혼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고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위대한 영웅들을 갖게 될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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