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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인간은 왜 그토록 끝없이 권력을 추구할까?

[강성학 칼럼] 인간은 왜 그토록 끝없이 권력을 추구할까?

기사승인 2023. 11. 0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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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간이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추구한다고 주장한 것은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처음이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생명의 보존과 잘살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권력을 추구한다. 즉 그에게 권력은 분명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권력이란 생존의 의지(will to living)이며, 이 생존의 의지는 곧 권력의 의지(the will to power)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배하려 든다. 태어나서 말귀를 알아들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울기만 하면 모든 욕구가 충족된다. 울어서 부모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장해 가면서 부모의 지시를 하나둘씩 거부하게 되지만 여전히 부모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산다. 그러면서 어린아이는 갈수록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이 아님을 체험하게 된다.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자의식이 생기면서 부모의 절대적 사랑인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가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과 비슷하게 그들은 갑자기 외로움을 '새롭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사랑을 얻지 못하면 그는 타인에 대해 강제적 지배를 모색한다. 타인의 지배에서 오는 만족감은 사랑받을 때의 만족감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지배자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폭군으로 변한다. 그런 면에서 권력은 부패된 형태의 사랑이다. 폭군은 마치 카사노바(Casanova)가 끝없이 사랑을 추구하듯 그는 권력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사랑과 권력이 고독이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와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명제는 현대인들에게는 기이하고 또 역설적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는 기쁘고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서 권력은 두 인간이 서로 자발적이고 기꺼이 복종하는 사랑과는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들은 오히려 상호배타적이다. 현대인의 마음이 권력을 향한 욕망과 인간의 본성 사이의 고유한 관계를 부인하는 한 현대인은 사랑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은 함께 속하는 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다. 현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순수한 현상을 특징짓는 헌신의 총체성(totality)이다. 사랑이 영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권력을 향한 욕망과 사랑을 향한 갈망 모두의 뿌리인 인간존재의 성질, 즉 '고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권력은 모두가 고독을, 그리고 이 고독에 기인하는 인간의 불충분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자기를 전체로 만들어 줄 통일을 이루기 위해 자기 같은 다른 인간을 추구한다. 그리고 인간은 권력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려고 한다. 사랑이 자연의 선물로 타인에게서 발견하려는 것을 권력은 심리적 조작의 책략을 통해 창조하려고 한다. 각자가 타인의 요소를 내포하는 것은 사랑과 권력의 공통된 성질이다. 사랑이 권력에서 출발하고 권력에 의해 항상 부패의 위협을 받는 것처럼 권력은 그것의 성취로 사랑을 향한다. 사랑은 비록 권력의 축소할 수 없는 잔여에 의해서 부패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성취에선 사랑과 동일하다.

사랑의 관계를 권력의 관계와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필연적 좌절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함께 속하는 두 인간의 결합이지만 그 재결합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결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의 자발적 복종은 감소되고 비자발적 혹은 습관적 복종으로 변질된다. 그러면 사랑은 결국 궁극적인 부패에서 권력과 동일하게 된다. 사랑은 각자의 개인성을 잃어버리고 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통일이다. 권력은 사랑이 원상 그대로 남겨두어야 할 개인성의 장벽을 깨뜨리려 한다. 권력은 사랑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들 때 그것은 사랑을 위험에 빠뜨린다. 권력의 축소할 수 없는 요소가 사랑의 안정된 관계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권력이 없이 사랑은 지속할 수 없다. 그러나 권력을 통해 사랑은 부패하고 파괴의 위협을 받는다.

권력관계의 일방적 강요를 상호관계로 변환하는 곳이 정치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진실된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한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같은 유형의 정치권력자들은 그들에게 결핍된 사랑을 끝없는 권력의 축적으로 보상하려고 했다. 언제나 보다 많은 인간들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킴으로써 그들은 사랑의 결핍을 지배의 성취로 보상받으려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구는 오직 더 많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낳을 뿐이다. 더 많은 인간들을 자기의 의지하에 두면 둘수록 더 많이 자신의 고독을 의식한다. 권력의 관점에서 본 성공은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실패를 설명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인간들의 지배자들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고독한 자이다. 왜냐하면 그의 고독은 자기 권력의 총체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권력에 의해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고전철학자들은 고독의 치유책으로 사랑이 아니라 우정(friendship)을 내세웠다. 인간들 사이의 우정이야말로 공동체의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는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되었다. 우정은 사랑과는 달리 우선은 엄격한 평등을 전제로 하는 인격의 결합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격들 사이의 우정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필연적으로 경쟁적 관계로 변질된다. 우정은 일반적으로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iad)에 등장하는 아킬레스(Achilles)와 패트로클로스(Patroclus) 간의 우정처럼 목숨을 바칠 만큼 절대적일 수 없다. 경쟁적 관계는 곧 권력의 관계이며, 헤겔의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만난 두 최초의 인간관계의 이론을 융통성 있게 적용한다면, 우정은 결국 지배의 투쟁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투쟁을 통해서 결국 '주인(master)'과 '노예(slave)'의 상호 인정된 관계로 전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정은 사랑만큼 강렬한 만족감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에 사랑보다 더 쉽게 깨어질 수 있다. 보다 온건하게 표현하여 우정도 사랑처럼 배신을 막기 위해서는 수직적 권력관계로 안정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의 추구를 통한 헛된 사랑의 추구는 그들의 성공적 권력의 대상에 파괴적이고 좌절된 사랑과 우정으로 상대방의 증오심을 가져온다. 증오심은 혁명의 동기가 된다.

오직 철학적 절제와 종교적 체념만이 진정한 치유책이지만 권력에 맛을 들인 자는 도박꾼처럼 스스로 멈출 수 없을 확률이 아주 높다. 그들은 경사진 언덕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인생의 파멸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불나비들처럼 맹목적으로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랑에 굶주린 참으로 고독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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