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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주역’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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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성규 기자

승인 : 2016. 02. 21. 18:47

7선 의원 지낸 야 원로…한나라당 총재대행 하며 여야 넘나들기도
이기택 전 총재 빈소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고인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부산 상업고등학교와 고려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1967년 제7대 국회 때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권에 진출해 7선 의원을 지냈다. 발인은 24일이며 장지는 4.19 국립묘지에 마련된다. / 사진 = 연합뉴스
4·19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지난 20일 오후 1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살. 이 전 총재는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정도(正導)로 돌파하는 소신 있는 야당의 정치 거목이었다.

21일 이 전 총재의 빈소를 찾은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방명록에 “선배님이 못다 한 민주주의, 산 자들이 이루겠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민주주의의 큰 기둥 이기택 총재님을 추모합니다”라고 기렸다.

4·19 혁명의 상징적 인물로 꼽히는 이 전 총재의 빈소에는 이틀째 정계 후배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부산에서 급히 상경한 정의화 국회의장은 “4·19 정신을 끝까지 유지·발전시키고 신념으로 정치를 해오신 후배들에게는 사표가 되는 분”이라고 기억했다. 김경재 전 대통령 홍보특보는 “대통령을 하고도 남을 분인데 절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조금의 예외도 없어서 불이익을 많이 받았다”면서 “양김(兩金)에 밀려 뜻을 펼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4·19세대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저항해 반(反)독재 구호를 외친 주역으로 운동권 1세대다. 이들 상당수가 정치권에 진출해 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지만 지금은 거의 퇴장한 상태다. 이 전 총재는 1967년 7대 국회 때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이 전 총재는 11대 국회를 제외한 8~10대(부산 동래)와 12~14대(부산 해운대)까지 당선해 7선 의원을 지냈다.

이 전 총재는 1987년 직선제 개헌 국면에서 김대중(DJ) 전 대통령 대신 김영삼(YS) 전 대통령 편에 섰다. 이 과정에서 신민당 사무총장과 부총재, 통일민주당 부총재 등을 지냈다. 하지만 1990년 YS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정당·김종필 전 총재의 공화당과 3당 합당을 할 때 참여를 거부하며 결별했다. 그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길 의원, 홍사덕·이철 의원 등과 함께 ‘꼬마민주당’을 창당해 총재로 선출됐다.

당시 평민당 대표였던 DJ는 경상도 세력이 필요해 이 총재에게 ‘당신이 당수하고 나는 대통령 후보 할테니 합당하자’고 제안했다. DJ는 이 총재에게 ‘이번 선거에서 패배하면 나는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당을 당신에게 주겠다’고 제의했다. 결국 두당이 합쳤고 DJ는 대통령후보로 나서 YS에게 패해 결국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 전 총재는 1992년 DJ가 잠시 정계를 은퇴한 동안 야당 총수로써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DJ가 정치에 복귀 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과정에서 배제됐다. 이후 새천년민주 당에 입당하고 16대 대선에서 과거 동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총재는 다시 참여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며 2007년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면서 여야를 넘나드는 정치행적을 남겼다.

이 전 총재의 장례식은 4·19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이 전 총재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4일 오전 9시다. 이 전 총재는 국회와 방배동 생가를 마지막으로 돌고 4·19 국립묘지에 영면한다.
맹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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