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독일 교민 출신 대북 사업가 박 모씨의 14일 전언에 따르면 그는 진짜 남북 분단 비극이라는 수식어가 과언이 아닐 만큼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괜찮은 그의 가족사를 살펴보면 정말 그렇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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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도교 교령과 서독 대사를 지낸 아버지가 1970년대 해외로 망명한 다음 북한에 정착한 이후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전자 서독 주재원으로 있었으나 귀국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서독 교민이 될 수밖에도 없었다.
집안 내력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서독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선 송두율 씨 등과 해외의 한국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 30여 년 전부터는 북한의 청우당 위원장으로 있던 모친의 권유로 대북 사업에 나섰다. 한때는 웬만한 알짜 중소기업이 부럽지 않을 만큼 사업도 잘 됐다. 금강산 해변에 말보로 같은 해외 글로벌 기업의 광고 입간판을 세워 영업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도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건강 악화는 어쩌지 못했다. 2년 전 뇌줄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결국 한라산과 백두산의 이름을 따 만든 한백상사의 염원이었던 남북 합동 자원 개발 사업의 꿈을 영원히 접고 말았다.
그의 가족은 남북 분단 비극의 상징답게 남북한과 미국에서 흩어져 살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홍사덕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과 절친한 고교 동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