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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분쟁에 개입하기를 꺼리며 애써 이 문제에 거리를 둬 왔다. 러시아는 심지어 탈레반을 저지하기 위해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당시 미국을 지지하기도 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던 하미드 카르자이는 “러시아 정부와 미국 정부의 이해가 충돌하지 않는 지구상의 유일한 장소는 아프가니스탄”이라며 자조적인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러시아는 더 이상 이 오랜 분쟁에 팔짱을 끼고 ‘중립’을 유지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7일 러시아·중국·파키스탄 외교 수장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지역 안보 현안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중심이 된 것도 러시아의 아프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한다고 매체는 전했다.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우선 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연합군에 의해 점차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설 곳을 잃어가고 있는 IS의 다음 피난처가 아프가니스탄이 될까봐 우려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러시아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다. 전직 외교관 출신인 아프가니스탄의 정치평론가 아흐마드 사이디는 “푸틴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이 IS의 거점이 될 경우 러시아의 국익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이디에 따르면 IS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탈레반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주고 있다. 탈레반은 지난 2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IS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빚어왔다. 그러나 미국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의 연구자 마이클 쿠겔먼은 러시아가 탈레반 쪽과 손을 잡는 것은 큰 위험성을 동반한다고 경고했다. 쿠겔먼은 “러시아는 IS의 가공할만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비국가 활동단체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며 “이는 러시아를 크게 우려스럽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내에서의 역할 확대를 통해 세계 무대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고 있다. 러시아는 탈레반과의 관계가 평화협상에 한정된다고 강조했지만,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와 탈레반의 관계가 그 이상이라고 보고 있다.
이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아프가니스탄과 서양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가 아프간 정부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정당이자 무장단체인 ‘히즈브 이슬라미’의 지도자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간의 평화협상을 막으려 한다고 보도했다. 아프간 정부가 평화협상의 일환으로 UN의 알카에다 관련 블랙리스트에서 헤크마티아르의 이름을 지우려하자 러시아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사실 히즈브 이슬라미는 규모가 작고 아프간 내에서 영향력도 크지 않지만, 아프간과 미국 관료들은 이번 합의가 더 힘이 있는 탈레반 단체와 평화협정을 맺는데 본보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WSJ은 지난 9월 아프간 정부와 히즈브 이슬라미가 평화협상에 합의하자 미국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큰 환영의 뜻을 밝힌 바 있다며, 러시아가 헤크마티아르의 블랙리스트 삭제를 막은 것은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마리아 자카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러시아가 블랙리스트 삭제를 막은 것이 아니라 잠시 보류한 것 뿐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미국 압박용으로 탈레반을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쿠겔만은 “‘적의 적은 나의 아군’식의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며 러시아가 탈레반과 관계를 강화하는 진짜 목적을 단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강조했다.
사이디는 우크라이나와 시리아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이 미국과 러시아의 알력 다툼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