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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수 선생은 1920년 평북 신의주 사람이다. 선생은 일제의 강제 징집된 학도병으로서 중국 서주에 배속된 후 일찍부터 계획하고 있던 탈출을 감행했다.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선생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다.
1944년 11월 화남지역 공작책으로 임명을 받은 한성수 선생은 주로 상해를 중심으로 적의 엄중한 감시를 피해 무전통신 작전 수행과 초모공작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의 상해 파견은 자청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을 탈출한 3월부터 불과 8개월 만에 적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45년 배반자의 밀고로 피체된 선생은 군법회의 재판에서 일어 사용을 강력하게 거부해 일어 통역을 불러와서야 재판은 속개됐다.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인데 왜 국어를 쓰지 않는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의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일 뿐이다”라고 소리 높여 답변했다.
그리고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너희들은 대일본 제국이 이번 전쟁에 승리할 것을 믿고 있겠지”라는 물음에도 선생은 태연자약하게,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미·영·중·소 등 연합국의 합동작전으로 태평양 방면은 물론 인면(인도 미얀마)전선과 중국전선에서 참패하고 머지않아 무조건 참패할 것이다. 그때 가서는 대한민국을 독립시켜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무수히 희생을 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침략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라고 분노의 음성으로 일갈했다.
이 군법회의에서 한성수 순국선열은 사형을 언도 받고 1945년 5월 13일 남경 형무소에서 참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제292호에 안장해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