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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처 퍼포먼스로 조현병의 낙인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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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5. 17. 08:00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
서울연극제에 던지는 묵직한 질문
질병보다 무서운 것은 사회의 시선이다
포스터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가 2025년 제46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으로 관객과 다시 마주한다. 오는 6월 7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202에서 펼쳐질 이번 공연은, 2023년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초연된 이후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가족이 겪는 낙인을 다룬 시의성 높은 텍스트로 주목받아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단순한 드라마를 넘어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반영하며, 연극적 사유를 견인하는 형식으로서 '렉처 퍼포먼스'의 가능성을 정면으로 제시한다.

'렉처 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는 강의와 연극의 결합이라는 형식적 실험을 넘어, 감정적 몰입보다 지적 거리에서 현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다. 이 연극에서 해설자는 영상, 그래픽, 도표 자료 등을 활용해 조현병이라는 질환의 과학적, 사회적, 제도적 맥락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배우가 큐레이터처럼 등장해 관객에게 정보를 '설명'하는 장면은 공연의 흐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를 유도하며, 사라의 개인 서사와 객관적 지식 사이에서 관객의 인식을 지속적으로 이동시키는 통로가 된다. 그 과정은 '연민'의 수준을 넘어 왜곡된 상식에 균열을 가하고, 낙인에 대한 공론장을 무대 위에 창출하는 시도다.

작품의 핵심서사는 조현병 확진을 받은 어머니를 둔 열일곱 살 소녀 '사라'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사라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엄마를 향한 사회의 시선을 자신도 내면화하고 있음을 깨닫고 고통스러워한다. "엄마가 조현병인데, 왜 내가 따돌림을 당해야 하죠?"라는 사라의 물음은, 이 작품이 사회적 낙인을 다루는 방식-정서와 이성, 사실과 상징의 균형 위에 세워진-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연극적 장치가 더해진다. 바로 '코러스'다. 코러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극 중 특수한 기능과 효과를 담당하는 역할을 지칭했다. 이 구성을 통해 작품은 사라의 내면과 사회 구조, 주변 인물과 상황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세 명의 코러스는 원형무대를 사라와 함께 돌며 그녀의 불안, 사회의 편견, 엄마의 병을 둘러싼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발화한다. 이들의 언어는 때로는 사라의 의식을 대변하고, 때로는 외부 세계의 목소리를 중계하며, 결국 사라의 '개인적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 낙인과 얽혀 있는지를 감각하게 만든다. 코러스는 연극 속에서 서사와 구조를 넘나드는 해설자이자 목격자로서, 관객과 인물 사이를 잇는 연결 다리로 기능한다.

이러한 형식적 실험은 연출가 최치언의 시적인 무대 구성과 결합해 더욱 선명하게 구현된다. 라이브 카메라와 감각적인 일러스트 영상이 더해져 사라의 내면 풍경을 이미지로 투사한다. 꿈과 환상의 장면은 실제 화면 속 몽환적인 질감으로 치환되고, 관객은 마치 사라의 심리 안쪽을 들여다보는 듯한 깊은 몰입감을 경험하게 된다. 2025년 재공연에서는 이러한 기술적 요소들이 보다 정교하게 보강될 것으로 기대되며, 무대 위에 펼쳐지는 '사유의 공간' 역시 더 깊이 있는 구현이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출발은 어느 여름 새벽 4시 48분. 사라는 스무 알의 항정신성 약물을 삼키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억과 환각이 교차하는 이상한 나라로 관객을 데려간다. 조현병의 초기 증상을 보였던 엄마의 봄, 사라의 일상과 무기력한 주변 어른들, 세상의 폭력적 프레임을 그대로 전파하는 언론과 콘텐츠-이 모든 것들이 사라의 언어를 통해 재구성된다. 해설자는 이 기억의 조각들 사이를 연결하며, 질병 그 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폭력성을 정면으로 해부한다.

출연진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 출연진. (윗줄 왼쪽부터) 사라 역 이다혜, 해설자 역 원인진. (아랫줄 왼쪽부터) 코러스 김란희, 김덕환, 이정진. / 사진 창작집단 상상두목
배우 이다혜가 주인공 사라 역을 맡아, 사춘기 소녀가 낙인에 맞서 성장해가는 내면의 여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그는 '그의 어머니', '벚꽃 동산' 등에서 보여준 세밀한 감정 표현으로 이번 무대에서도 집중력을 이끈다. 해설자 역은 극작가이자 배우인 원인진이 맡는다. 코러스는 김란희, 김덕환, 이정진이 맡는다. 이정진은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 등에서 연출가 최치언과 오랜 호흡을 맞춰왔다.

이번 공연은 형식적 실험뿐 아니라, 공연 접근성 측면에서도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청각장애인과 외국인을 위한 '스마트 자막안경' 서비스, 사전 대본 열람, 정신건강전문요원이 상주하는 '릴렉스드 퍼포먼스' 회차 등은, 조현병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공연이 포용적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작품의 메시지가 특정 집단의 고통에만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될 수 있도록 설계된 이 프로그램들은 '연극적 연대'의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이상한 나라의, 사라'는 단지 관객을 울리거나 감동시키는 연극이 아니다. 이 작품은 낙인과 침묵, 무지에 맞서 연극이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사라의 말처럼, "표식은 드러내야 한다." 그 표식을 지우거나 감추는 대신 드러내고, 관찰하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연극이 건네는 가장 단단한 위로다.

서울연극제 여섯 번째 공식선정작 '이상한 나라의, 사라'. 낙인을 말하는 방식부터 새롭게 쓰기 시작한 이 연극은, 렉처 퍼포먼스라는 형식을 통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연극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지금, 이 이상한 나라로의 초대는 그 물음에 답하려는 모두에게 향해 있다.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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