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용 작별 인사부터 팬들의 항의 집회까지… 상징과 갈등이 교차한 ‘기성용 더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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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용 더비'라 불린 이날 경기는, 상징적인 미드필더를 떠나보내는 팀과 그를 품으려는 팀이 처음 마주한 맞대결이었다. 서울에서만 10시즌을 뛴 기성용이 구단과 결별을 결심하고 포항으로 향하는 과정이 알려진 뒤, 팬들은 이 경기를 단순한 리그 일정이 아닌 하나의 분기점으로 받아들였다. 그에 따라 경기장의 공기는 이례적으로 무겁고 날카로웠다. 구단에 실망한 팬들과, 팀을 향해 끝까지 목소리를 내는 지지자들이 충돌 없이 뒤섞인 공간. 선수들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장 축구다운 방식으로 해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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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 전부터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전례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오후 4시, 북측 광장에서는 개인 지지자들이 주최한 'FC서울 장례식' 퍼포먼스가 열렸다. 방어회와 제사상, 향이 놓인 행사장은 한 레전드의 퇴장을 애도하는 동시에 구단 운영진과 김기동 감독에 대한 집단적인 항의의 장이었다. "무능, 불통, 토사구팽"이라는 문구가 쓰인 플래카드와 함께, "김기동 나가", "기성용을 지키지 못한 서울"이라는 외침이 이어졌다.
관중석 역시 격앙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규 응원은 보이콧되었고, 서포터들이 자리한 북측 스탠드를 비롯해 동측 스탠드 위층까지 항의성 걸개가 도배됐다. 기성용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경기장을 조용히 응시했고, 전광판에 김기동 감독의 이름이 등장하자 야유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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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오프와 함께 경기장 안팎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선수들은 제 할 일을 시작했다. FC서울은 초반부터 압박의 강도를 높이며 공격적인 태세를 취했고, 이는 곧 결과로 이어졌다. 전반 15분, 루카스가 페널티박스 안에서 파울을 유도해 얻은 페널티킥을 제시 린가드가 마무리하며 선제골을 터뜨렸다.
이 골로 기세를 올린 서울은 포항 수비를 더욱 흔들었고, 전반 28분 포항에 치명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중원 싸움 도중 오베르단이 황도윤의 안면을 팔꿈치로 가격해 퇴장당한 것이다. VAR 온필드 리뷰 끝에 경고가 퇴장으로 변경되었고, 이로 인해 포항의 중원 밸런스는 붕괴됐다.
서울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전반 32분, 황도윤의 백패스를 받은 루카스가 빠르게 전진해 골키퍼와의 일대일 상황을 침착하게 마무리하며 추가골을 기록했다. 이어 전반 추가시간, 린가드의 감각적인 패스를 받은 둑스가 왼발로 감아차며 세 번째 골을 터뜨렸다. 서울이 전반에만 3골을 넣은 것은 약 1년 2개월 만이었다. 전술적 승리, 기세 싸움의 승리, 그리고 심리전의 완승이었다.
결국 FC서울은 기성용 이적 파동이라는 전례 없는 혼란 속에서도, 그라운드에서만큼은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였다. 린가드, 루카스, 둑스, 클리말라 등 외국인 공격수 4명이 나란히 득점에 성공하며 4-1 대승을 거뒀다. 이는 서울의 올 시즌 리그 최다 득점이자, 3개월 만에 거둔 홈 승리이기도 하다.
이 승리로 서울은 승점 30(7승 9무 5패)을 기록하며 리그 6위로 도약했고, 포항은 승점 32(9승 5무 7패)로 4위 자리를 간신히 지켜냈다. 기성용이라는 이름이 남긴 흔적은 경기장을 가득 채웠지만, 서울 선수들은 결과로써 팬들의 야유에 응답했다. 혼란을 이겨낸 이 한 경기의 승점 3은 단순한 숫자가 아닌, 서울의 후반기 반등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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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후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박태하 포항 감독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 속엔 많은 생각이 엿보였다. "수적 열세는 축구에서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다. 퇴장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술적 선택이 제한됐다"며 오베르단의 퇴장이 전체 경기 플랜을 무너뜨렸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희망도 이야기했다. 이날 복귀한 이동희가 후반 29분 만회골을 터뜨리는 등 일부 선수들의 활약은 후반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박 감독은 "곧 기성용이 팀에 합류한다. 경기 조율, 패스 타이밍, 중거리 킥 등에서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며 중원의 불안정함을 그를 통해 메울 수 있음을 강조했다. 7월 3일 메디컬 테스트 이후 포항 합류가 확정되면, 데뷔 무대는 7월 19일 전북전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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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인다. 팬들의 분노는 당연한 반응이다." 경기 종료 후, 김기동 감독은 "홈에서 정말 오랜만에 이긴 것 같다"며 안도의 뜻을 전했다. 그는 "홈에서 못 이기다 보니 나도, 선수들도 서두르고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며 그간의 부담을 언급했고, "그래도 준비한 대로 선수들이 잘해줘서 좋다"고 경기 소감을 밝혔다.
경기 전, 그는 취재진에게 "지금은 말보다 결과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켜냈다. 외국인 선수들의 집중력, 전반에 터진 3골, 전술적 조율 모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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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린가드는 이날 경기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페널티킥 선제골과 둑스의 골을 돕는 날카로운 패스까지, 그의 활약은 완벽했다. 하지만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는 공을 기성용에게 돌렸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먼저 다가와준 선수가 기성용이었다. 주장 역할을 맡게 된 뒤에도 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며 "그는 지금 떠나더라도 영원히 서울의 일부로 남을 것"이라 말했다.
또한 "오늘은 경기 외적으로 어려운 분위기였지만, 우리가 서울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자부심을 되새기며 뛰었다. 선수들에게는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집중하자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그의 발언은 이날 그라운드 위 선수들의 태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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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후, 출전명단에 없던 기성용이 깜짝 등장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팬들 앞에 섰다. "지난 10년간 정말 행복했다. 특히 복귀 후 5년은 늘 죄송스러웠다. 서울로 돌아온 뒤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이별은 언젠가 찾아오는 것이지만, 조금 더 빨리 왔다. 서울이 나로 인해 더 이상 힘들지 않기를 바란다. 남은 선수들은 열심히 할 것이다. 팬들이 팀과 선수들을 응원해 주신다면, 저도 편히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작별을 고했다.
기성용은 FC서울에서만 10시즌을 보냈고, 유럽 무대에서 돌아온 후에도 친정팀을 선택했다. 이날 그의 메시지는 단순한 퇴장이 아닌, 지난 시절에 대한 작별이자 새로운 시작에 대한 예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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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대승은 경기장 안에서만 유효했다. 경기 종료 후, 수십 명의 팬들이 선수단 버스를 둘러싸는 이른바 '버막' 사태가 벌어졌고, 경찰과 소방이 현장에 출동하는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팬들은 김기동 감독의 사퇴와 구단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대치는 약 40분간 지속됐다.
현장을 찾은 구단 단장과 김기동 감독은 직접 마이크를 들고 팬들 앞에 섰다. 김 감독은 "죄송하다. 이틀 뒤 간담회를 통해 모든 걸 말씀드리겠다"고 전했고, 이에 따라 상황은 가까스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팬과 구단 사이에 쌓인 불신이 얼마나 깊고 구조적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장면이었다.
4-1이라는 대승 이후에도 박수보다 침묵과 질문이 더 많았던 그날, FC서울이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경기장 밖에 남아 있었다. 이날 승리는 단지 숫자상의 결과가 아니라,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기 위한 첫 시도이기도 했다.